'소년급제'에서 나락에 떨어진 불운의 사나이.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TV에 '나홀로 집에'가 단골로 방영된다. 개봉 30년이 됐지만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만큼 인기를 얻었던 영화다. 이 영화를 볼때마다 주인공 캐빈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의 부침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이 영화로 일약 대 아역 스타로 떠 오른 맥컬리 컬킨. 그는 결국 인생의 3대 덫의 하나라는 '소년급제'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이제 그도 30대 중반에 접어든 어엿한 중년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마약을 했고 알콜중독 역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옛 말 틀린 게 없는 듯 하다. 어릴적 고생이 인생 최대의 선물이고, 소년시절 출세가 이후 인생여정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린시절의 갑작스런 출세는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유대인들의 가정교육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대교 경전인 토라를 배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패체험이다.
이 두가지가 집안 교훈의 핵심이다. 특히 이 교육중 실패를 체험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초기 성공은 인생마라톤에서 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중년에 접어든 그 역시 제2의 인생을 걸을수 있지만 재기의 모멘텀을 찾지 못해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그는 1980년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컬킨의 집은 넉넉하지 못했다. 7남매 중 셋째인 컬킨은 전화교환원으로 일하는 어머니와 작은 성당에서 잡일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984년 4살이었던 그는 마이너 연극무대인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아역연기자로서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이후 몇 편의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러던중 1990년 '나홀로 집에' 시리즈에 출연하게 된다. 이 때 당시 그는 10살.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영화 《마이 걸》, 《리치 리치》 등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인기와 부를 동시에 얻었다. 당시 그는 편당 800만 달러를 출연료로 받는 슈퍼스타가 됐다. 그러나 그의 이른 성공은 빠른 몰락의 계기가 되고만다.
컬킨은 15번째 영화 《좋은 아들》을 마지막으로 14살 때인 1994년 돌연 은막에서 사라진다. 1995년 컬킨의 부모가 결별 하면서 2년간 자신의 재산과 양육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관경을 보고 16살 사춘기였던 컬킨은 슬럼프에 빠졌다. 한 때 자신의 매니저였던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져 지금은 말을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컬킨은 "아버지가 계속 나를 영화에 출연시키면서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면서 "그는 나를 정신적으로 학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정신적인 휴식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18세에 결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결혼생활도 2년을 못 넘긴다. 이후 여러 명의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하나 그리 원만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뉴스는 찾아보기 어렵다.
2000년대들어 다시 재기하려 했으나 실추된 이미지를 만회하지 못했다. 일이 꼬이면서 마약과 알콜의존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얼마전 인터뷰에서 이제는 영화,TV 등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의 은퇴선언을 한 셈이다. 현재는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살고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알아보는게 싫어서 야간에 주로 활동한다고 한다. 산책도 사람이 뜸한 곳에서 새벽 2~3시에만 한다고 한다. 최근에 포착된 그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늙어보인다.
몇 년 전엔 코미디 록음악그룹을 결성하면서 뉴욕 브루클린 콘서트 투어도 했지만, 얼마후 이 그룹도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그의 개인인생은 허물어졌지만 뉴욕 입장에서 보면 컬킨이 이만저만 고마운 존재가 아닐수 없다.
플라자호텔과 센트럴파크 등 뉴욕 곳곳에서 촬영된 '나홀로 집'의 명성 때문에 이를 추억하는 관광객들은 뉴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캐롤송이 울려 퍼질무렵인 요즘이 그 때다.
<곽용석 기자/미국 뉴욕주 공인중개사/henryk@nestseeker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