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회사는 어딜까. 두산그룹이다. 올해로 창업 122년에 이른다. 그런데 이 두산의 박승직(1863∼1950) 창업주가 장사, 즉 사업가의 길로 나서게 된 계기가 명성왕후 민비 집안(여흥 민씨)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박승직의 아버지는 여흥 민씨 일가가 집안 제사를 봉행하는 재원으로 운영하던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즉 소작농이었지만 규모 있는 토지에서 농사를 총괄하는 일이어서 아마도 박승직 창업주의 집안과 여흥 민씨 집안과의 신뢰 관계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하간 박승직은 이런 인연이 바탕이돼 민씨 집안의 지주 민영완이 구한말 당시 해남군수로 부임하게 되자 수행 비서로 그를 따라 나선다. 해남은 제주와 한반도 육지 간의 생산물 중개지역이었다.

당연히 전국의 보부상들이 몰려들었고 박승직은 군청 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들과 교분을 쌓았고 장사에 눈을 떴다. 그렇게 번돈 300냥을 집에 부치기도 했다.
경기도 광주집에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보부상 대열에 올랐다. 광목과 옥양목을 말 등에 싣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 마판상(馬販商)이었다. 요즘 같으면 1톤 트럭에 물건을 싣고 다닌 셈이다. 그렇게 모은 돈을 밑천 삼아 1896년 드디어 종로에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그의 나이 33세때의 일이다. 이 상점이 바로 두산의 기원이다. 박승직 상점은 일본 종합무역상사인 이토추(伊藤忠)상사와 손을 잡고 국내 수입 사업품목을 하나씩 늘렸다. 이토추상사와의 연은 이토(伊藤)히로부미(博文)가 놓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승직이 중추원에서 정3품 관직에도 오르는데 중추원은 일본의 꼭두각시였다.
박승직은 1938년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과 일본은 한 몸)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됐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당시 기업인이라면 누구나 일본정부와 선이 닿지 않고선 제대로 사업을 할 수 없었겠지만 나중에 친일했다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다. 재력과 벼슬을 모두 갖추게 된 배경에는 보이지 않은 후원이 있었다는 시각이지만 이에 대해 기업을 운영하기위해선 불가피한 측면이 당시에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박승직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인 1905년에 자신의 상점이 있는 종로(일명 배오개)에 광장(廣藏)시장을 만들고 이를 관리하는 회사로 ‘광장주식회사’를 내세웠다. 건물 임대,창고업을 비롯해 소매 금융을 했다. 오늘날 두산타워가 종로 끝자락이자 동대문 인근에 자리잡은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듬해에는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된 한성상업회의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지금도 서울상공회의소 회장은 두산 쪽에서 맡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옛 한성)상공회의소 회장은 관례대로 대한성공회의소 회장을 맡는다. 형 박용성 회장에 이어 회장 자리에 오른 박용만 회장 역시 현재 두산이프라코어의 회장이다.
박승직은 1933년에 국내에 있던 쇼와기린맥주의 주주가 되면서 맥주 사업에도 참여했다. 쇼와기린맥주가 1945년 해방직후 철수하자 아들 박두병(창업2세)에게 경영을 맡긴 것이 OB맥주 설립의 밑거름이 됐다. 재미난 것은 박승직 상점의 국산 히트상품은 창업주의 셋째 부인 정정숙이 고안한 가루분 화장품이다. 이름하여 박가분(朴家紛)으로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화장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