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1:45 (금)
뉴욕을 만든 사람들③ 뉴욕 수돗물값 대신 낸 록펠러
뉴욕을 만든 사람들③ 뉴욕 수돗물값 대신 낸 록펠러
  • 곽용석 이코노텔링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18.11.15 1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도 뉴욕시민들은 물 값 안 내… 말년 40년은 자선에만 몰두
록펠러는 억만장자였다. 하지만 말년에 그가 말한 소망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다. 90세가 넘자 그는
록펠러는 억만장자였다. 하지만 말년에 그가 말한 소망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다. 90세가 넘자 그는 "넘어지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소원"라고 말했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수돗물 값을 내지 않는다. 물론 일부 기업이나 대저택등엔 수도요금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하수도 정화요금은 있어도 상수도 요금을 내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대부분 주에서 요금을 상수도 요금을 과금한다. 그러나 뉴욕시는 상수도 요금이 없다. 바로 존 록펠러 덕택이다.

냉혈한과 박애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세계적인 비즈니스맨 존 록펠러.
록펠러의 유언에 따라 록펠러 재단에서 뉴욕 주민들을 대신해 뉴욕시 전체 수도세를 부담하고 있다.
록펠러는 뉴욕주 리치포드에서 1839년에 태어났다. 태생이 뉴요커는 아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뉴욕에서 보낸 점에서 뉴요커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했다. 그의 집안도 역시 힘들었다. 어릴 적 빈곤은 근면 성실로 삶의 기본 토대를 갖추는데 훌륭한 선생이 됐다. 14살부터 어려운 일을 가리지않고 일했다. 조그만 가게 경리 보조원 업무도 봤다. 철저하고 빈틈없은 성격과 절약 정신으로 그는 주변사람들로 부터 신임을 얻었다.

 20살에 미국 중부 클리블랜드에서 육류와 곡류 창고를 갖춘 유통회사를 차려 큰 돈을 벌었다. 이후 친구의 권유로 석유 유통사업에 뛰어든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확 바꾸어 놓는다. 석유라는 액체가 전세계 시장을 강타할 만한 재료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적중했다. 1870~1880년대에 폭발적인 석유 수요로 인해 사업은 어마어마하게 커져 나간다.  그의 사업 의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석유에 관련된 사업에 하나씩 하나씩 진입해 들어간다. 나아가 경쟁사까지도 사들인다. 그리곤 그 회사를 없애거나 합병시켜 버린다.

  비정한 비즈니스 세계의 단면을 미국 산업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놓는다. 나중엔 유통부분도 손을 댄다. 철도회사의 횡포에 석유제품의 수급에 영향을 받자, 철도회사까지 흡수해버린다. 유통망 전체를 자신의 휘하에 뒀다. 결국 석유라는 하나의 제품에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손에 넣게 된다. 원유 채취, 가공 및 운송 등 일련의 전 과정을 그의 손아래에 둔다.
석유에 관한한, 경쟁사가 전혀 없다. 완전 독점공급과 유통이었다. 미국산업에 '독점' 또는 '트러스트' 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과유불급. 달이차면 다시 기울듯, 정부와 국민의 시선들이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결국 국가가 손을 댄다. 1911년 그룹해체를 요구한다. 소위 반트러스트법 위반이라는 규제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록펠러그룹을 산산히 조각내 수십개의 작은 회사로 쪼갠다.

록펠러는 이미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의 마음도 '돈'에서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룹해체가 되기 훨씬 전이다. 이미 그의 나이 60에 이른 1890년대 그는 색다른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바로 자선사업이다. 젊은 시절 셀수없는 돈이 들어오자 그는 그 돈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를 놓고 밤새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곤 다짐을 했다. 나이 60이 되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돈을 쓰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그리곤 59세되는 해에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는 미련없이 자선사업에 몰두한다.

시카고 대학을 비롯, 록펠러의약연구소와 록펠러 재단을 설립했다. 뉴욕의 유엔본부 자리도 그가 기증한 땅이다. 12개의 종합대학, 12개 단과대학, 4900여개의 교회를 지어, 사회에 바쳤다. 뉴욕의 문화복합단지인 링컨센터에도 거액의 금액을 기부했으며,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도 그의 거금 쾌척이 없었다면 건립이 어려웠다.

시카고대학은 개교이래 100년간 노벨수상자 70명이나 배출한다.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그많은 대학과 교회에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나아가 뉴욕의 수도시설 설비에 거의 전액을 들여 지원했다. 지금도 수도물 공급관련 비용을 록펠러재단이 맡고 있다. 그 덕에 일반 뉴욕시민들은 수도물값을 내지않고 무료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죽기 전까지 거의 40년이다. 돈을 버는데 투여된 시간보다 자선사업으로 보낸 기간이 더 길다. 비정한 록펠러의 이미지와 자선사업가 록펠러의 이미지가 혼동스럽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단순하게 보아도, 후자가 그의 이미지에 더욱 맞지않나 싶다.
90세를 넘긴 말년의 록펠러는 죽기 전에 가장 원했던 소망이 100세까지 거동하다가 넘어지지않고 매일같이 골프 9홀만이라도 돌았으면 하는 것였다. 미국 최대의 거부가 바라는 목표치곤 단순하기 짝이 없다. 분명 노년에는 돈보다는 평범한 필부의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젊은 록펠러보다야 못하지만 말년의 록펠러보다는 낫지 않을까. 록펠러는 망백을 바라보는 98세에 잠을 자듯 조용히  '자본주의 세상'을 떠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