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패권은 물론 명예도 리더십도 지켰다…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1971년 8월의 '닉슨쇼크' 이후 미국은, 그야말로 위기를 맞는다. 경제 패권을 잃은 데 이어 부통령은 뇌물 사건으로 사직하고,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린다. 2년 뒤에는 중동에서 전쟁까지 터진다. 순식간에 유가가 폭등하자 미국의 위기는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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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1970년대 금본위제의 붕괴 과정을 보자. ①1971년 8월 '닉슨쇼크'를 시작으로 ②세계 통화체제에 혼란이 일자 ③1971년 12월 세계는 '금태환 불가(不可)'를 전제로 달러를 금에 연계한 '스미소니언체제(Smithonian System)'를 출범시킨다. 하지만 ④달러에 대한 불신과 통화체제의 혼란이 재개됐고 결국 ⑤1976년 1월, 금본위제의 완전 폐지와 변동환율제의 이행을 결의한 '킹스턴체제(Kingston System)'가 출범한다. 이렇게 금본위제는 '역사'가 된다.
이 과정에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1971년 12월 출범한 '스미소니언체제'는 '킹스턴체제'가 출범한 1976년 1월까지 약 4년 동안 정상적으로 작동했던 것일까? 역사책에는 별 얘기가 없다. 그냥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 달러'였다. 기축통화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년이 좀 지날 무렵 결국 탈이 난다. 1973년 2월에는 일본, 3월에는 유럽공동체(EC)가 변동환율제로의 전환을 결정한다. 많은 전문가는 바로 이때, 스미소니언체제가 실질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본다.
이때부터 달러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금과 연동된 '대장 돈', 즉 기축통화에서 내려와 다른 돈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 갖는 힘과 명예, 리더십 모두를 잃어야 했다. 시간이 가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공산주의 진영과의 '냉전'이 지속됐던 가운데 끝날 것으로 기대했던 베트남전은 다시 시작됐다. 부통령은 수뢰 혐의로 사직하고, '워터게이트'라는, 닉슨이 연루된 정치 스캔들은 허구한 날 신문 지면을 장식하며 닉슨을 옥좼다.
그러다 더 큰 일이 터진다. 그해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 다시 한번 중동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제4차 중동전쟁). 전쟁 발발 직후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의 생산 감축과 가격 인상을 단행, 유가가 폭발한다. 두 달 새 네 배가 된다. 미국의 고통은 더 컸다.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미국이 이스라엘을 도운 보복으로 원유 수출 금지까지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경제의 추락은 피할 수 없었다.
■ "석유 금수 해제는 애당초 불가능했던 일"
기축통화국이라는 경제 패권을 상실한 직후 터진 전쟁이었다. 미국은 그야말로 '위기' 상황을 맞는다. 하지만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공존을 뜻한다. '위기' 상황에서 '기회'를 잡은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국가나 정부의 사례도 있다. 1973년의 미국과 닉슨 행정부가 대표적이다. 그냥 '성공'도 아니다. 위기 속에서 '대박'을 쳤다. 잃어버릴 뻔했던 달러의 가치 및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지켜냈다. 달러 패권은 물론 명예도 리더십도 지켰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우선 이론을 보자. 미국은, 닉슨 이전부터, 달러를 너무 많이 찍었다. '달러 과잉생산'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해결 방안? 보통의 상품과 마찬가지다. '수요처'를 늘리면 된다. 남아도는 달러를 필요로 하는. 결론적으로 1973년 미국과 닉슨은 이 '신규 수요처' 개발에 성공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처한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을 '극복'한 게 아니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욱 배울 가치가 있다.
다음 기사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키신저 국무장관은, 파이살 국왕에게 미국에 대한 사우디의 석유 금수 조치를 완화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보도에 따르면, 중동의 평화를 모색하는 자신의 성실성에 대해서만큼은 확신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11월 9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는 한 기자가 이런 기사를 써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본사에 송고했다. 11월 9일이 어떤 날인가.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고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미국에 대한 석유 금수를 발표한 지 20일이 지났던 때다. 19일 전인 1973년 10월 20일에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하던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한, 이른바 '토요일 밤의 학살'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마침내 전쟁이 종결된다.
다시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자. "키신저가 미국에 대한 사우디의 석유 금수 조치를 완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게 리드문이다.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 기사 제목도 "사우디를 석유 금수 조치에서 흔들지 못한 키신저(Kissinger Fails to Sway Saudis From Oil Embargo)"로 잡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다음 문장이다. "중동의 평화 모색에 대한 자신의 성실성에 대해서만큼은 확신을 줬다"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해석은 이렇다. "현찰 주고 어음 받았다"거나 "실리는 빼앗기고 명분만 챙겼다"는 것이다.
진짜 그럴까? 9년 뒤 키신저가 쓴 자서전 《격변의 세월(Years of Upheaval)》을 보면 이 해석이 뭔가 석연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키신저는 책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금수 조치를 부과한 지 2주 만에 이를 해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썼다. 이게 무슨 말일까? '석유 금수 조치 해제'는 이미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그러니 '금수 조치 해제'는, 세상은 다 그렇게 봤지만, 키신저에게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최우선 방문 목적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는 또 "(금수 조치 해제)는 급진적인 아랍인들과 함께 신뢰를 쌓아야 했던 사우디 전략의 핵심을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라는 글도 남겼다. 사우디가 급진 아랍인들과의 사이가 깨지는 것을 우려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금수 조치 해제'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사실, 이날 키신저는 이미 딴마음을 먹고 있었다. 미국과 대부분의 세계가 희망했던 석유의 원활한 공급에 대해 키신저는 이미 '되지도 않을 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가 '진짜' 원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재미나게도 《뉴욕타임스》 기사에 이미 나와 있다. '중동 평화를 찾는 그의 성실성에 대한 확신'이다. 기사는 이 목적이 달성됐다고 썼다.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다. 이는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인종적으로 '적대국' 소속이었다. 아랍의 맹주를 대표하려는 사우디의 신뢰를 얻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사를 보라. 성공했다는 것 아닌가! 진짜 큰일을 일궈낸 셈이었다. 이로써 그는 한 발 더 나가도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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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