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0 00:55 (화)
북방외교, 남북경협 헌신한 장치혁 회장 영면
북방외교, 남북경협 헌신한 장치혁 회장 영면
  • 이코노텔링 성태원 편집위원
  • iexlover@naver.com
  • 승인 2026.02.09 2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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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장도빈 선생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 섬유업계에서 큰 족적 남겨
YS정부 때 대통령의 비공개 특사자격으로 여러차례 방북해 김일성 등 만나
부동산이나 서비스업 투자 안해…"기독교 신앙관 기업경영통해 구현 노력"
지난 5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원로 섬유기업가 장치혁(張致赫) 전 고합그룹 회장이 9일 발인식을 갖고 영면에 들어갔다.

지난 5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원로 섬유기업가 장치혁(張致赫) 전 고합그룹 회장이 9일 발인식을 갖고 영면에 들어갔다.

1935년 4월 평북 영변에서 독립운동가 장도빈(1888∼1963) 선생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국 섬유업계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또 기업인에만 머물지 않고 독립운동가 부모를 둔 후손답게 북방 수교와 남북경협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에도 여러모로 헌신했다.

장 회장은 20세기 후반부(1960~90년대) 한국 재계에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다 마침내 영면했다. 재계에선 그를 두고 전형적인 자수성가(自手成家)형 기업인이자 정·재계를 넘나든 지략가라고 말해왔다.

그는 부동산이나 서비스업에 투자하지 않고 섬유·화학 등 제조업과 수출에 승부를 걸었다. 또 기술개발과 세계화, 개척과 혁신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의 화섬(化纖) 및 화학 산업을 이끌었다. 창업 오너였지만 전문경영인 같은 면모가 많아 권한을 전문경영인들에게 많이 이양했다.

92년쯤으로 기억된다. 그가 "외국 기업인들을 만나면 한국 기업들의 의사결정 구조가 마치 군대처럼 경직돼 말만 자유 자본주의 국가지 마치 사회주의 국가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자신의 신앙관을 기업경영을 통해 구현하려 애쓰기도 했다.

'장치혁'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북방 수교 및 남북 경협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폭 넓은 대외 네트워크와 정보망을 가졌던 까닭에 정부 당국자나 내로라는 그룹기업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냈다.

80년대 중반 국내 기업인으로선 처음으로 미(未) 수교국인 중공을 방문하는 등 현지 요인들과의 인맥을 십분 활용해 92년 역사적인 한·중 수교(노태우 정부)에 큰 기여를 했다.

YS 정부 때는 대통령의 비공개 특사 자격으로 92년 첫 방북 이래 여러 차례 북한을 드나들며 김일성, 김정일을 만나 금강산 개발, 나진·선봉 개발 등 남북경협을 모색했다. DJ 정부 시절인 2000년 6월 15일 열렸던 역사적인 남북 정상(김대중-김정일) 회담에도 전경련 남북경협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대통령을 수행했다.

이처럼 러시아 및 대북 경협 추진에 관한 한 그는 현대 정주영 회장과 함께 두 손가락에 꼽혔던 민간 기업인이다. 현대아산이 맡게 된 금강산개발 사업은 당초 장 회장이 맡기로 하고 일이 시작된 것으로 재계에 알려져 있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개 그렇듯이 장 회장도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무척 어렵게 보냈다. 6·25 전쟁 직후 어수선한 시절이었던 54년, 서울 법대 1학년이었던 그는 미국 유학을 추진했으나 배삯 5백 달러가 없어 좌절하고 만다. 그는 학업을 접고 서울 방산시장 좌판 장사에 나서 바닥에서부터 사업을 익히기 시작했다.

10년도 넘게 사업의 기본기를 닦은 그는 마침내 1966년 1월 섬유업체인 고려합섬을 창업해 한국 재계에 얼굴을 드러냈다. 이후 석유화학, 전기·전자 등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90년대 후반 약 15개 계열사를 통해 연 매출 4조 원을 넘기며 재계 17위로까지 도약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대기업 중 첫 워크아웃 대상 기업이 되고 만다. 그는 당시 고합, 고려종합화학, 고려석유화학 등 3사를 합치는 등 구조조정을 꾀하며 정상화를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2001년 그가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고합그룹은 사실상 와해됐다.

그는 IMF 때 부도가 났던 데 대해 통한(痛恨)의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당시 상당수 계열사들이 흑자를 내고 있었던 만큼 은행의 유동성 지원만 있었으면 공중분해는 피할 수 있었다고 본 듯했다.

2003년 그는 대출사기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불구속기소돼 1심 징역 4년, 2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2007년 대법원에 의해 원심을 확정받았다. 그 여파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등이 생겨 1년 반 이상 병상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10여 년 전인 2015년 1월 그는 공중 분해된 고합 창립 50주년을 맞아 옛날 회사 임직원 200여 명과 자리를 함께하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는 많은 대외 직책을 통해 나라와 사회에 기여했다. 1989∼200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91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1992년 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 1992∼2001년 한·러시아극동협회 회장, 1992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1993년 한국경영자총협회 수석부회장, 1998년 민주평통 이북5도 대표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나옥주 씨와 2녀(장호정·장호진), 사위 제레미 장 FTI컨설팅 수석고문, 김형준 기린건축 대표이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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