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6:55 (토)
세계경제 수도 '뉴욕을 만든 사람들' 연재중
세계경제 수도 '뉴욕을 만든 사람들' 연재중
  • 곽용석 이코노텔링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18.11.02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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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스타이브센트= 조그마한 포구를 도시로 변모시킨 이방인 혁신가
1660년경 스타이브센트 초상화. 뉴욕 역사 소사이어티 박물관 소장
1660년경 스타이브센트 초상화. 뉴욕 역사 소사이어티 박물관 소장

 

어떤 나라나 도시도 탁월한 몇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고 진화된다.

400년전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 곳에 돛단배 정박 부두를 만든 이후 조금씩 커져갔던 뉴욕 마을은 영국인의 손을 거쳐 200년전 미국식민지 항구로 변모하면서 나날이 커져간다. 이후 이리운하 개통과 길드시대를 맞아 유례없는 경제발전과 함께 뉴욕은 미국동부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로 발전해 나간다. 나아가 세계 1, 2차 대전을 거쳐 세계 최대 도시로 발돋움해 오늘에 이른다.

과연 이렇게 짧은 시기에 전세계 최고의 도시로 발전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도시의 관용성과 공평한 기회’다. 로마제국 천년 영속의 비

세인트 마크스 보우리 교회, 지하에 스타이브센트가 잠자고 있다. 그니리치빌리지에서 이스트빌리지 지역인 스타이브센트 동네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 맨해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다. ⓒ곽용석)
세인트 마크스 보우리 교회, 지하에 스타이브센트가 잠자고 있다. 그니리치빌리지에서 이스트빌리지 지역인 스타이브센트 동네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 맨해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다. ⓒ곽용석)

 

결이 바로 외지인에 대한 공평한 기회 부여와 포용성, 그리고 자유스런 공기이다. 로마가 사라진 이후 천 년, 그러한 환경으로 다시 태어난 뉴욕에서 ‘영원할 수 있는 제국’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620년대 자그마한 항구 마을에서 오늘의 뉴욕으로 성장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한번쯤은 되새겨 봐야 할 오늘날의 뉴욕을 만든 사람들을 추출해보았다.

여기 소개된 사람들 대부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이 곳에서 일생을 살았거나 이 곳을 위해 혼심을 받친 사람들이다. 그 중엔 별난 사람도 있고 기이한 일생을 산 사람도 있다. 젊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가 중년에 고꾸라져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도 있다. 반면 오랜동안 고생끝에 장년에 성공해 화려한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나 사람들이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우리 주변 사람들 인생처럼 평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장면들도 있다.

이들 모두 자기 인생을 뉴욕과 미국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교훈들을 남기고 떠났거나 현재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한순간이라도 허투루 살지않도록 노력했던 그들의 인생 역정이 뉴욕을 오늘날 세계경제의 수도로 만들었다. 경제역사 전문채널 이코노텔링이 오늘부터 <뉴욕을 만든 사람들>들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⓵ 피터 스타이브센트/ 뉴욕을 도시답게 만든 주역

맨해튼 동남쪽인 이스트 빌리지 부근에 대단지 아

세인트 마크스 보우리 교회 앞길인, 스타이브센트 스트리트에 있는 일본인 식당. 400년 전엔 네덜란드 사람들이 살았고 이후 영국인, 독일인 등 수많은 유럽사람들의 거주지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음식을 팔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혼합의 정도를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까. ⓒ곽용석
세인트 마크스 보우리 교회 앞길인, 스타이브센트 스트리트에 있는 일본인 식당. 400년 전엔 네덜란드 사람들이 살았고 이후 영국인, 독일인 등 수많은 유럽사람들의 거주지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음식을 팔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혼합의 정도를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까. ⓒ곽용석

 

파트 숲이 있다. 이 곳은 ‘스타이브센트 지역’이라고 명명한다. 주거용 아파트 단지 100여 동에 1만 가구가 넘는 세대가 살고 있고 인구수는 총 2만 7천여명이 넘는다. 이곳은 원래 가스 저장소가 있던 곳으로 1940년대 늘어나는 인구를 대비해서 아파트 단지로 대대적으로 개발한다. 그 당시 뉴욕 최대 인구이동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셈이다. 이 곳을 스타이브센트라는 사람을 기리고자 그렇게 명명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그는 미국 사람이 아니다. 네덜란드 사람이다. 오늘의 뉴욕을 있게 만든, 뉴욕을 도시 형태로 만든 장본인이다.

1600년대 초반, 영국인 항해사 헨리 허드슨은 네덜란드의 명을 받아 유럽에서 아시아 쪽, 특히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발하기 위해 몇 번의 항해를 거듭하며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이 곳 뉴욕 항구 남단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만다. 그는 네덜란드의 정부에 훌륭한 항구를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중국임무는 거의 포기상태에 이른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네덜란드 정부는 이 곳에 관리를 보내 확인하지만 그다지 멋들어진 항구는 아니고 그저 자연적인 항구 조건이 괜찮은 그러나 무역물품은 훌륭하지는 않은 곳이었다. 비버나 물개의 모피 등 값싼 물품 정도가 생산되거나 유통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 돈 되는 것은 향료나 금 등이었다. 말하자면 물 좋은 물품 거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을 운행하는 거점으로서 활용하는 정도다.

때문에 당시 네덜란드는 이 곳을 늘어나는 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고 적절한 기지로서의 활용 거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1647년 네덜란드인 스타이브센트가 총독으로 이 곳으로 부임해 온다. 당시 이 곳 이름은 뉴암스테르담. 영국은 항해와 무력의 강성화로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 이 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때였다. 스타이브센트 총독도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뉴암스테르담을 도시화하면서 이 곳을 방어하기 위해 주민들의 안정화와 사회화를 목표로 한다.

영국의 손에 공짜로 넘어간 뉴암스테르담

1664년 8월 영국은 미국 쪽의 항로와 무역시장의 확장으로 결국 뉴암스테르담에 대한 검은 욕심을 드러낸다. 맨해튼 앞바다에 4척의 포선을 띄우고 소위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군사력은 영국이 앞섰다. 물론 그 상황은 스타이브센트 총독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직분을 다한다. 모든 힘을 모아 영국군을 물리치자고 군인과 주민들에게 설득하면서 명을 내린다. 그러나 주민들 대부분은 반대했고 영국과 전쟁보다는 화해를 원했다. 주민대표 대부분이 평화로운 협정을 청원한다.

그의 아들까지도 이에 찬동하자 결국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영국과 협상을 진행한다. 협상 반, 위협 반으로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을 포기하고, 얼마간의 금전적인 비용을 받고, 남미에 있는 수리남을 이양 받는 선에서 합의를 한다.

거의 공짜로 영국에 넘겨준 셈이다. 당시 수리남의 상황은 뉴암스테르담과 비슷하지만, 거의 개발이 안된, 항구 가치로서나 무역 기지로서 뉴암스테르담보다 훨씬 처진 곳이다. 왜 네덜란드 주민들은 영국에 이양하는 것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을까?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무역업자였던 것이다.

그 당시 맨해튼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네덜란드인들은 전체의 3분의 1이 안될 정도로 소수였고 대부분 다른 국가 사람였다.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폴란드, 독일 등 유럽의 다른 나라 출신들로서 무역을 위해 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곳은 세계 인종들의 종합도시이며 인종 용광로였다. 네덜란드에 대한 국가적인 충성심과 애국심은 없던 것이다. 그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무역사업이 잘만 된다면 맨해튼 상공에 어느 나라 국가의 깃발이 올라가든 상관없던 것이다. 오늘날 맨해튼이 세계적이고 융합적인 인종의 교류와 문화의 혼합은 이미 4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세계적인 도시로서의 기초를 닦은 노력과 공로

결국 네덜란드는 영국에 맨해튼을 넘긴다. 그리고 스타이브센트는 지금의 이 곳 그리니치빌리지 동네에 거주하면서 전원생활을 한다. 그 당시 이 곳은 조용한 언덕과 구릉지로 전원 농촌 생활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이 곳 과수원에서 마지막까지 인생을 보낸다.

그와 그의 가족은 당시에 맨해튼 북동쪽인 그레머시 파크, 스타이브센트 지역 주변에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보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보우리는 네덜란드 단어로 ‘농장’을 의미한다. 지금도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이스트빌리지로 넘어가는 길 이름이 보우리 스트리트다. 그 중간에 그가 묻힌 ‘세인트 마크스 보우리 교회’도 있다.

뉴욕을 촌동네에서 도시로 성장시킨 그의 노력만큼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날의 세계적인 도시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이 곳 총독으로 취임한 후 그는 원래 있었던 작은 길 브로드웨이를 통해 북쪽의 뉴할렘까지 길을 제대로 닦았다. 그 당시 유통망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도로였으니 도로를 잘 정비해놓는 것이 무엇보다 도시화의 첫 단추였다. 또한 영국의 침입을 미리 감지하고 북쪽 지역에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이 700미터 정도의 담을 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월스트리트인 것이다. 도시로서의 안전, 보안 및 방위를 위한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또한 늘어나는 외지인 유입과 기존 주민, 그리고 원래 살던 원주민 인디언과의 분쟁 등을 조화롭게 융합하면서 작은 항구이지만 효율적으로 도시를 운영해 나갔던 것이다. 일요일에는 금주를 하도록 하는 등 윤리적인 규율을 엄하게 적용했으며, 항구 정비와 학교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기초를 닦았다. 당시 필요했던 노예를 비롯 외국인들도 계속 받아들였다. 도시로서의 발전에 속도를 낸 것이다.

결국 몇 년 만에 작은 항구는 3천 여명 이상의 도시로 성장했다. 주민 분포도 전세계에서 몰려들기 시작해, 벌써 그 당시에 거의 20개 국가의 언어가 이 작은 마을에서 들렸던 것이다.

이미 코스모폴리탄이었던 것이다. 그는 유대인 같은 소수 종교인들을 향해 불경스럽고 더럽고 사기꾼 같은 사람들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격이 강했다.

그는 독실한 청교도주의 입장에서 그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교육만큼은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려서 받은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다’라고 외쳤다. 그 당시에 이미 그 자그만 읍내에 20여개가 넘는 학교를 세워 무식한 거주민을 상대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젊어서 잃어버린 한쪽 다리로 인해 육체적으로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면서도 강인한 총독으로서 초기 맨해튼의 모습을 일구어 놓았다. 그의 공로는 400년이 다 된 맨해튼의 여기저기에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스타이브센트 단지 이름도 그를 추억하는 건물 중의 하나다.

<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 미국 뉴욕주 공인중개사henryk@nestseek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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