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2 13:20 (월)
[김성희의 역사갈피] 특권 명문화한 '선청'(先請)
[김성희의 역사갈피] 특권 명문화한 '선청'(先請)
  • 김성희 이코노텔링 편집고문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5.12.22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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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나라 때 귀족 등은 황제에게 물어봐 체포, 심문할 수 있는 제도 만들어
높은 벼슬아치는 처벌을 하더라도 벌금을 내면 감형 해주거나 아예 면죄해줘
'통일교 게이트'를 둘러싼 수사나 재판을 보면 , '법 앞의 평등'과는 '거리 멀어'
중국 한나라 시절 절대 권력자인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라면 얼마든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건 영국 역사가 존 달버그 액턴 경이 한 유명한 말이다. 한데 그가 어느 편지에 쓴 이 경구(警句)에서 흔히 놓치는 대목이 있다.

그 말 앞에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란 구절이다. 이건 권력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제어 장치가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란 뜻의 뒷말만 인구에 회자된다.

하지만 요즘 우리 정치판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앞의 말이 훨씬 더 타당해 보인다. 뿐만 아니다. 부패에 대한 처벌도 권력 유무 또는 권력과의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옛 중국에서도 이는 '진리'였다. 일찍이 중국 고전 오경 중 하나인 『예기』에는 "예법은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벌은 대부(大夫)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란 구절이 나온다. '대부'는 예전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이니 이들에게는 법도 피해 간다는 의미였다. 물론 당초 이들에게 형사 처벌의 예외를 둔다는 규정은 아니었다.

유교 지식인인 이들은 예법을 잘 지켜 욕된 일을 저지르지 않거라 믿었기에 굳이 형벌을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강했다. 이것이 권력을 위한 '특권'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를 명문화해 보여주는 것이 중국 한나라 시절 '선청(先請)'이란 제도다. 이는 귀족 및 600석 이상의 관리는 반드시 황제에게 물어봐 그 지시에 따라 체포, 심문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물론 심문 때에도 고문을 받지 않았고. 심문 뒤에도 법 절차에 따라 판결하는 게 아니라 황제의 비준을 얻어야 했다.

절대 권력자인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라면 얼마든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음을 뜻했다.

설사 처벌을 하더라도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는 관례에 따라 벌금을 내고 감형해주거나 아예 면죄해주는 것이 가능했다. 즉, 감봉 처분을 하거나 직위를 강등하거나 면직시키는 것으로 벌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벼슬이 높을수록 이런 방법을 통해 벌을 상쇄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심지어 현재 맡은 관직뿐 아니라 과거에 맡은 적이 있던 관직으로도 죄를 상쇄할 수 있었다.

가령 유배형에 처해질 만한 죄를 범한 6급 직사관(職事官)이 6품 이하의 훈관(勳官·작호만 있고 직분은 없던 벼슬)을 겸하고 있다 하자. 일단 현직에 있으니 1년의 형벌을 상쇄하고, 다신 훈관의 관직으로 1년을 상쇄한다. 여기에 과거 종전에 맡았던 8품 관직을 이용해 나머지 1년을 상쇄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벼슬만 떨어지는 데 그쳤으니 당사자로선 법을 어겼거나 부패했더라도 아주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이건 중국 고전 읽기를 다룬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천쓰이 지음, 글항아리)이라는 발칙하고도 도발적인 인문 에세이집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데 중국까지 멀리, 그리고 한나라까지 오래도록 거슬러갈 필요가 없다. '통일교 게이트'를 둘러싼 수사나 재판을 보면, 21세기 한국에도 보이지 않는 '선청' 제도가 엄존함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법 앞의 평등'은 개나 줘 버려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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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편집고문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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