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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3)'떠오르는 태양' ㊥무기력한 미국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3)'떠오르는 태양' ㊥무기력한 미국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19.10.21 2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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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 약진에 경외심"… 지금력 앞세워 '미국의 첨단기업' 인수에 제동
도요타는 자동차, 소니는 전자 분야에서 세계시장 호령…일본,고속 성장 구가
무역 적자에 高실업과 인플레 시달리던 미국에 '레이거노믹스'의 리더십 나와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레이건의 '강한 미국' 과 닮음꼴로 비쳐저
70년대 일본 기술력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과 공포는 하루 이틀 된 얘기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기술발전 속도는 눈부셨다.

1980년 대 일본을 향한 미국의 심정은 복잡했다. 일본의 경이로운 발전에 두려움과 놀라움, 부러움과 혐오, 시기와 질투,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영화 <떠오르는 태양>이 눈에 띄는 이유는 바로 그 같이 복잡한 심리를 잘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술', 그중 '첨단기술'에 대해서는 거의 경외심(敬畏心)까지 엿보인다.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자체가 일본 기업의 미국 첨단 기술 기업 인수와 그 막후에서 벌어지는 음모다. 미국은 일본에 자국의 기술을 빼앗기지 않겠다며 의회까지 나선다는 이야기 설정이다.

영화에서 일본 기술에 대한 미국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많다. 미국의 반도체 기업 마이크로콘 인수 관련 회의에서는 일본 나카모토그룹의 도청기술로 미국 기업의 패가 다 노출됐고, 살인사건 현장을 담은 CCTV 영상은 사라졌고, 사라졌던 CCTV 영상이 경찰에 전달됐을 때는 누군가 고도의 기술로 교묘히 화면을 조작한 것이었으며, 그 화면을 다시 원래의 화면으로 되돌리기 위해 경찰은 일본계 기술 기업을 찾아갔고, 결국 경찰이 개인적으로 아는 기술자가 이를 바꿔놓는데, 이 역시 일본계였다. 모두 '일본인에 의한' 기술의 마법이다.

일본 기술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과 공포는 하루 이틀 된 얘기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기술발전 과정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자동차 분야다. 전쟁 전부터 자동차를 생산하던 기업은 물론, 미군정의 재벌해체 정책의 결과 엔진 등 군수산업을 담당하던 대기업이 작게 쪼개지면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기업의 활약도 눈부셨다. 특히 1933년 설립돼 군용트럭을 생산하던 도요타가 눈에 띈다. 도요타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기술개발에 매진, 1970년대 세계적인 석유 파동 과정에서 낮은 가격, 좋은 연비, 튼튼한 차라는 이미지를 무기로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미쓰비시, 혼다, 닛산 등 전통적인 기술 강기업도 힘을 더해, 일본 자동차산업은 1966~72년 사이 연간 29%씩 성장했으며 1979년에는 한 해 생산량 1000만 대를 돌파해 자동차 왕국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자동차 이외 부문에서도 일본의 기술 성장은 괄목할 만했다. 1960년대에 일본은 이미 라디오 생산 세계 1위 국가였으며 1970년대에는 TV 분야까지 석권했다. 그뿐 아니다. 1979년 일본은 스위스를 누르고 세계 최대 시계 생산국이 됐으며, 1970년대 말 철강생산능력은 미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 제트엔진, 공작기계, 로봇, 반도체, 전자계산기, 복사기, 원거리통신, 원자력발전, 로케트공학 등 대부분의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유럽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태양'의 한 장면. 일본 나카무라그룹이 인수한 한 연구소로 영화는 일본의 ‘기술’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떠오르는 태양'의 한 장면. 일본 나카무라그룹이 인수한 한 연구소로 영화는 일본의 '기술'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전후 일본의 고성장은 이 같은 기술 발전의 결과였다. 일본은 1953년 이후 20년 동안 성장률이 연 평균 9.7%에 이르렀는데, 이는 이전까지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었다. 일본 기업의 상대는 전 세계였다. 이는 또한 일본이 '무역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혀줬다. 1978년 일본은 '무역대국 일본'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세계만방에 알렸다. 그해 일본의 무역흑자 규모는 760억 달러로 사상 최대 규모였던 것이다. 이 정도면 1970년대를 뒤로 하고 1980년, 새로운 10년을 맞는 미국의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미국 40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당시 미국경제는 일본과 달랐다. 인플레, 무역적자, 고실업 등에 신음하고 있었다. 1981년 1월 취임사를 보면 미국의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다. 그가 '평범한 미국인이 영웅'이라는 논리와 함께 미국의 '꿈'과 '희망'을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취임 후 그는 '강한 미국' 건설에 매진한다. 그것이 아마도 경제위기 아래서 '영웅인 평범한 미국인과 함께 이끌어 갈 꿈과 희망과 목표'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의 취임사 한 부분을 들어 보자.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 가장 길고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 그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삶을 산산조각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 (그러나) 우리는 영웅의 꿈을 꿀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웅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람들은 어디를 봐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공장 문을 드나드는 영웅들을 볼 수 있습니다. ... 저는, 제가 '영웅'이라 부르는, 이 축복받은 나라의 시민인 여러분께 연설하기 때문에 '여러분'과 '여러분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 희망, 목표는 이 정부의 꿈, 희망, 목표가 될 것입니다."

36년 뒤인 2017년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Donald John Trump)도 레이건의 뒤를 잇는다. 다음은 그의 취임사 일부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우리의 부와 힘, 자신감은 수평선 위로 사라졌습니다. 공장은 하나씩 문을 닫고 해안을 떠났으며 수백만 명의 미국 노동자들이 남긴 것에 대해 생각조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제품을 만들고, 회사를 훔치고, 직업을 파괴하는 다른 나라의 폐허로부터 국경을 보호해야합니다. 보호는 큰 번영과 힘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나는 내 몸의 모든 호흡으로 당신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 그리고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다시는 이길 것입니다."

1981년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취임식(왼쪽)과 2017년 제45대 대통령 로널드 트럼프의 취임식(오른쪽). 일본과 중국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에 맞서야 했던 두 대통령은 모두 ‘강한 미국’과 ‘미국 우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1981년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취임식(왼쪽)과 2017년 제45대 대통령 로널드 트럼프의 취임식(오른쪽). 일본과 중국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에 맞서야 했던 두 대통령은 모두 '강한 미국'과 '미국 우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위기의식'과 '강한 미국'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멕시코 국경에 펜스를 치고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세게 물리고 일본에 반강제로 미국산 옥수수를 팔아치우고 중국과의 갈등이나 전쟁을 불사하는 그의 행태는 딱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럼프가 레이건의 추종자라는 사실은 알려진 그대로다. 그의 행태가 레이건을 연상시키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 30여 년 전 레이건 시대를 다시 한 번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이건 시대의 시작은 '레이거너믹스(Reaganomics)'로 불리는 레이건 정부의 경제정책이다. 초기 레이거노믹스의 핵심은 다섯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①인플레 방어용 금융정책 ②투자 및 소비 유도를 위한 감세정책, ③생산성 향상을 위한 규제완화정책, 그리고 ➃'강한 미국' 건립을 위한 강(强)달러 정책과 ➄군비강화 정책이다.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특히 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승리, 소련 해체를 이끌었다는 측면에서 레이건에 대한 미국의 존경심과 애정은 대단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이 다섯 가지 정책은 대부분 '실패'로 규정할 만 하다. 인플레를 잡겠다며 취임 후 1년 반 동안 했던 긴축정책은 전후 최악의 불황과 실업을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1년 반 뒤에는 다시 케인즈식 경기부양책을 받아들였다. 개인에 대한 소비세와 기업의 법인세 등에 대한 감세정책은 군비강화와 함께 재정적자만 크게 확대시켰고 규제완화 역시 생산성 향상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강달러 정책은 강한 미국보다는 무역적자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결론적으로 레이건 정부 초기 경제정책은 재정 및 무역 부문에서 적자, 그러니까 '쌍둥이 적자'를 키웠던 것이다.

우선 재정 부문을 보자. 레이건 취임 다음해인 1982년 재정적자액은 1307억 달러로 전해보다 80% 늘었고, 1983년도 재정적자액은 1899억 달러로 45.2% 증가했다. 증가규모는 한 해 전보다 줄었다지만 재정적자 규모 전체는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재정적자의 주요 원인은 무론 감세에 있었다. 하지만 '강한 미국'을 캐치프레이즈 삼아 늘린 5000억 달러 전후의 군사비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물론이다.

무역 부문도 마찬가지였다. 많지는 않아도 그런 대로 흑자를 유지하던 미국의 무역 수지는 1970년대 들어 적자와 흑자를 오르내리더니, 마침내 1976년 이후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문제는 레이건 취임 이후 그 폭이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1982년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레이건 정부 2기 째를 맞은 1985년의 무역 적자는 무려 16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세계 최강 경제를 자랑하던 미국이 이제 2등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커지고 있었다.

레이건 정부는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어느 나라, 어떤 정부나 '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세금인상은 꺼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눈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무역적자를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일본에 답이 있었다. 대일(對日) 무역 적자가 시작된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1965년을 그 기점으로 봤다. 하지만 레이건 등장 전까지는 그나마 견딜만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대일 무역 적자액이 해마다 늘더니 1984에는 331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보인다. 이는 전체 무역 적자의 3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미국 재계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1980년대 들어, 10년 뒤에는 적자 규모가 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예상은 곧 깨졌다. 1985년 상반기를 넘어서자 그 해 무역 적자가 500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9월의 대일 무역 적자는 마침내 사상 최대를 돌파했다. 재계 전문가들의 예측했던 기간을 5년이나 단축시켰던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이 재선됐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사상 최대 쌍둥이 적자에 실업률 또한 7%에 이르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재선을 비관적으로 보던 인물도 많았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재선에 성공했고 이제 그는 경제를 살려야 했다. 정부는 서둘렀다. 두 번째 임기가 개시됐던 1985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행동에 들어갔다. 이때 깃발을 든 학자들이 이른바 '환율론자'들이었다. 이들은 '강한 미국'을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강달러' 정책을 무역적자의 핵심으로 봤다. 그러니 답이 나왔다. 달러 정책을 '강(强)'에서 '약(弱)'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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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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