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30 22:05 (수)
◇김수종의 취재여록 ㉓ 석유로 읽는 미국 (2) 트럼프, '묻어둔 천연가스' 투자 손짓
◇김수종의 취재여록 ㉓ 석유로 읽는 미국 (2) 트럼프, '묻어둔 천연가스' 투자 손짓
  • 이코노텔링 김수종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5.07.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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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알래스카 땅 속에 묻어두었던 천연가스 2025년 다시 전략 자원으로 지목
일본과 한국 등에 '가스 수출' 의지…극지용 LNG 운반선이 등장한 지금은 '공상 아냐'
유전은 언제나 '기름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알래스카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푸르도베이 유전을 취재한 것은 1986년 7월 말이었습니다. 당시 앵커리지대 김춘근 행정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유전 회사 측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제 이름으로 된 비행기표는 앵커리지 공항의 탑승 카운터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침 9시, 인디언 얼굴이 그려진 '빅스마일' 로고의 알래스카 에어라인 보잉727기는 앵커리지 공항을 이륙하자마자 곧장 구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봉의 빙하를 내려다보며 북극으로 향하는 특별한 장면을 기대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구름 속을 날아 북극해에 인접한 푸르도베이 상공에 도달했습니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고도를 낮추자, 동토지대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북극해는 내가 상상했던 푸른빛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회백색 바다와 그 주변에 드문드문 자란 풀, 소호수들이 얼룩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기장은 "기온 섭씨 3.3도, 양호한 날씨입니다"라고 안내했고, 유전 근로자들은 두꺼운 파커를 꺼내 입으며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터미널에 들어서자, 키 큰 백인 남성이 다가와 "Mr. Kim, Welcome to Arctic Sea!"라며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는 소하이오(SOHIO) 석유회사 공보 담당자인 토니 킨더넥 씨였습니다.

킨더넥 씨는 인근 카페로 안내해 커피 한 잔을 건넨 뒤, 이 지역의 기후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는 북위 70도입니다. 여름에는 두 달 가까이 해가 지지 않지요. 한여름에도 기온이 섭씨 7도를 넘지 않고, 8월 중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이듬해 6월까지 겨울이 이어집니다. 한겨울에는 섭씨 영하 51도까지 떨어집니다."

◇얼음 땅 위의 거대한 '병영'=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던 건물들은 실제로 소하이오와 아코(ARCO) 석유회사가 운영하는 근로자 숙소와 작업시설이었습니다. 약 5천 명의 인원이 이곳에서 머물며 근무하고 있었고, 마침 점심시간이라 대형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시켜 간단히 식사한 뒤 건물 내부를 둘러보았습니다.

그곳은 마치 크루즈선처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러닝코스도 있었고, 벽면은 모두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겨울철 내내 눈밖에 보이지 않아 생기는 '캐빈 피버(cabin fever)'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했습니다. 근무자들은 2개월간 일하고 2개월간 휴식을 취했으며, 휴가 기간에는 앵커리지로 돌아가게 되고 왕복 항공료는 회사에서 부담했습니다.

◇유전 현장, 그러나 원유는 보이지 않았다= 킨더넥 씨는 트럭에 저를 태우고 유전지대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박스형 콘크리트 구조물과 파이프라인이 드문드문 보였고, 그 외엔 특별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기름이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푸르도베이 유전은 자동화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천연가스가 먼저 터지고, 이어 섭씨 90도가 넘는 고온의 원유가 솟습니다. 중앙통제실에서 압력을 조절하며 추출하지요. 지상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원유는 지하 배관을 따라 터미널로 옮겨졌다가, 다시 앨라스카 대송유관을 통해 1,200km 떨어진 발데즈 항으로 보내집니다."

그동안 여러 유전을 취재해 보았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원유가 솟는 장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류 유출 사고 현장에서야 비로소 원유의 실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천연가스, 태우지도 못하고 묻어둔 자원= 킨더넥 씨는 이 유전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천연가스를 꼽았습니다.

"원유층 위에 천연가스가 아주 많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불태웠지만,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지금은 다시 땅속으로 주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가스를 다시 활용할 방법도 생기겠지요. 다시 가스의 압력이 원유 추출을 돕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푸르도베이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하루 원유 생산량이 150만 배럴이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의 하루 석유 소비량은 약 54만 배럴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2024년 현재, 푸르도베이의 생산량은 46만 배럴로 줄었고, 한국은 하루 290만 배럴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격세지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땅속에 묻어두었던 천연가스는 2025년 다시 전략 자원으로 떠올랐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본과 한국 등에 이 가스를 수출하겠다며 투자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북극 항로가 열리고, 극지용 LNG 운반선이 등장한 지금은 더 이상 공상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북극의 여름, 모기와 순록의 계절= 트럭을 타고 동토지대를 달리는 중, 킨더넥 씨는 창문을 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모기떼가 들이닥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차에서 내리자마자 귀에 '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피부가 따끔했습니다. 북극의 여름은 모기의 계절이었습니다.

그는 툰드라 초원을 내달리는 순록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왜 순록이 저렇게 달리는지 아십니까? 바로 모기를 피하려고 그러는 겁니다."

이 지역에는 한때 10만 마리가 넘는 순록이 서식했다고 합니다. 석유 개발 이후 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순록은 이 동토의 주인처럼 보였습니다. 유전을 취재하러 갔지만,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기름이 아닌 모기와 순록이었습니다.

◇북극해에 세워진 '대우'의 물공장= 그날 킨더넥 씨는 나를 북극해 바닷가의 한 시설로 데려갔습니다.

"이 물공장은 한국 대우가 만든 것입니다. 조립을 한국에서 한 뒤 바지선에 실어 3개월 걸려 이곳까지 운반했지요. 1억달러 짜리 시설입니다"

이 담수 공장은 식수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석유를 퍼낸 뒤 생긴 지하 공동을 메우기 위한 용도였습니다. 북극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기술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킨더넥 씨는 이곳에 근무하는 유일한 한국인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충청도 출신의 이한구 씨는 40대 초반으로, 유전지대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노동자였습니다. 벌써 8년째 근무 중이었고,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근무 조건은 2개월간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그 뒤 2개월은 쉬는 방식이었습니다. 시급은 12달러, 시간 외 수당은 1.5배, 주말 특근까지 포함하면 연간 수입이 5만 달러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숙식과 항공료는 회사에서 제공했기 때문에 저축이 가능했고, 이미 앵커리지에 17만 달러짜리 집도 장만했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LA로 돌아가 이한구 씨의 이야기를 기사로 전했더니, 교포 사회에서 문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당시만 해도 LA 교포 노동자들이 한 달 1,500달러 벌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육상 및 해상의 여러 유전을 취재해 보았지만, 유전에서 실제로 원유가 솟는 장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유전은 언제나 '기름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굴뚝과 파이프라인, 펌프만 있을 뿐, 기름은 땅속 깊이 감춰졌다가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정에서 유조선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유소로 흘러 갑니다.

1986년 여름, 북극 푸르도베이 유전을 취재하며 에너지 자원의 현장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기술, 환경, 국제 질서가 얽힌 복잡한 그림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날 보았던 순록과 모기, 대우의 시설, 그리고 이한구 씨의 삶은 지금도 제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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