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6 07:20 (토)
[이만훈의 세상만사] ⑲ 1만 2천년 전 '농업 태동'
[이만훈의 세상만사] ⑲ 1만 2천년 전 '농업 태동'
  • 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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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5.07.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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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먹고 버린 씨앗이나 줄기서 똑같은 씨나 열매가 열린다는 걸 발견
그냥 뒀더니 엉뚱한 풀들만 무성해져 작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풀 제거
인간을 정착하게 하고 밭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게끔 한 것은 작물이 아니라 잡초들이었다.

하늘의 조화는 알 수가 없어요. 당장 모든 걸 태워버릴 듯이 그렇게 열기를 내리더니 이번엔 모든 걸 쓰러버릴 듯이 물세례를 퍼부으니 말이에요.

'황매시절가가우(黃梅時節家家雨: 매실이 익어갈 참이니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청초지당처처와(靑草池塘處處蛙: 연못가 풀 섶에선 개구리가 요란스레 울어대네)'

매실이 노랗게 익을 무렵엔 비가 오게 마련이라 이를 매우(梅雨) 또는 황매우(黃梅雨)라고 한다지요. 해마다 초여름인 유월 상순부터 칠월 상순에 걸쳐 계속되는 장마를 이르는 말이기도 한데 올해 조금 늦게 왔네요. 비가 오시면 개구리들만 장치는 게 아니라 우리 풀들도 살 판 나죠. 엊그제까지만 해도 타는 목마름으로 시들 새들 비실거리다 오늘 번들거리는 우리 친구들 낯빛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들의 표정은 떨떠름하니 어쩌면 좋죠. 지기들이 애써서 가꾸는 작물이란 친구들도 우리들만큼이나 작열(灼熱)하는 여름 볕에 혀를 빼물고 할딱거리며 기진맥진하다 비를 맞고 정신을 차린 게 분명하거늘 마치 비가 우리들한테만 감로수(甘露水)인양 눈을 가로로 뜨고 세로로 뜨며 버럭 욕을 해대니 말이에요.

"이런 엠병 하고 땀을 낼 것들을 봤나!"

이유는 딱 하나, 우리가 더 이드르르한 거겠죠.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요. 아니 이 땅이 지들만의 겁니까. 연고로 치면 우리가 훨씬 오래된, 원조 중의 원조 아닙니까. 지들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부터 대를 이어 이 땅을 지켜온 게 우리이니 굳이 따지자면 우리가 주인이죠. 헌데, 까마득한 아랫것들이 느닷없이 나타나 주인 행세를 해대니 이 무슨 경우에 빠지는 짓거리인지 모르겠어요. 그 땅에서 내내 살아온 인디언을 내치고 지들이 주인인양 온갖 패악을 저질러온 미국 양키들의 허튼 짓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단 하나도 빠지지 않아요.

인간들은 참 고약한 족속이에요. 지독히 이기적이고 오만한데다 모질기가 짝이 없어요. 우리를 한마디로 잡초라고 무시하고 몰아 부치는 걸 보면 '호박에 말뚝 박기', '애 밴 여자 배 걷어차기', '5대 독자 거시기 까기' 등을 밥 먹듯이 한 놀부의 유전자를 가진 게 분명해요.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을 뭉뚱그려 일컫는 말로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제거의 대상'이라는 게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안 얘기를 좀 하자면 동물에 대응하는 '식물'이란 이름이 종중(宗中)이고, 나무에 대응한 '풀'이 성(姓)이나 마차가지입니다. 성이 있으니 풀마다 당연히 이름이 있죠.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풀의 여러 가지를 한 통속으로 묶어 저주(?)처럼 낮잡아 부르는 건 우리한테는 참을 수없는 모욕입니다. 아무리 못 생기고 미워도 개별적으로 이름을 쳐들며 뭐라 뭐라 해야지 잡초가 뭡니까. 당신네 인간들에게라면 '잡놈'이란 멸칭과 마찬가지 아니에요? 우리를 대놓고 풀 가운데 양아치로 취급하다니요. 얼마나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름들이 있다고요.

#인간들이 잡초라는 오명(汚名)을 붙이는 친구들은 논과 밭, 그리고 산소에 나는 풀들이에요. 그밖에 마당이나 길 등 풀이 있어선 안 되는 공간에 난 친구들도 간혹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이 경우엔 대부분 풀때기란 비칭(卑稱)으로 퉁치곤 하죠. 이렇게요. "원 마당구석이라곤 어느 결에 온갖 풀씨가 천지로 벌산해 풀때기로 뒤덮였으니 쯧쯧."

이렇게 보면 가황(歌皇)이라 불리는 나훈아의 명곡 '잡초'의 가사는 엉터리에요.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로 시작하는데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언덕바지에 '조용히' 있는 풀까지 '쓸데없이 나서 걸리적거리고 제거해야 할 웬수 같은 대상'으로 이름을 붙이는 건 아니지 않나요? 가사의 전체 내용은 이름을 모르는 풀을 연민(憐憫)하는 뜻인데 그 주인공에게 그만 '잡초'라는 주홍글씨를 안겼으니 모르고 저지른 실수일 테지만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인 셈이죠.

#앞에서 보았듯이 잡초의 주산지(?)는 논과 밭, 그리고 산소인데 그 중에서도 으뜸은 밭이에요. 밭에 심는 작물이 다양하듯이 풀들에게도 다양성이 보장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만큼 잡초의 왕국이기도 한 것이죠. 망초, 개망초, 쑥, 개똥쑥, 바랭이, 돌피, 강아지풀, 명아주, 질경이, 씀바귀, 고들빼기, 뚝새풀, 냉이, 뽀리뱅이, 지칭개, 비름, 쇠비름, 가시비름, 개비름, 가는털비름, 방동사니, 쇠뜨기, 미나리, 개기장, 까마중, 달맞이꽃, 깨풀, 환삼덩굴, 소리쟁이, 토끼풀, 석류풀, 자귀풀, 차풀, 중대가리풀, 도꼬마리, 자리공, 여뀌, 벼룩나물, 갈퀴덩굴, 피대가리, 메, 홍초, 엉강퀴, 도깨비바늘, 민들레, 방가지똥, 며느리밑씻개, 애기똥풀, 이질풀, 사위질빵, 꽃다지, 돌콩, 광대나물, 억새, 비수리, 띠풀, 물봉선, 맥문동, 속속이풀, 쇠무릎, 박주가리, 제비꽃, 괭이밥 등 아는 것만 대충 챙겨도 숨이 찰 정도로 많습니다.

이 땅의 인간들한테 주식인 쌀을 생산하는 논은 특성상 물을 대야하기 때문에 그곳에 자라는 잡초 또한 물풀 종류일 수밖에 없어 가짓수가 그리 많지는 않죠. 그래도 농부들이 가장 애를 먹는 피를 비롯해 가막사리, 강피, 돌피, 드렁새, 뚝새, 등에풀, 물달개비, 마디꽃, 물별, 물옥잠, 물별이끼, 물피, 바늘골, 미국외풀, 바랭이, 미국가막사리, 밭둑외풀, 사마귀풀, 세대가리, 알방동사니, 개구리밥, 여뀌, 여뀌바늘, 자귀풀, 한련초, 가래, 나도겨풀, 너도방동사니, 네가래, 물고랭이, 벗풀, 세섬매자기, 속속이풀, 올미, 올방개, 올챙이고랭이 등 30여 가지나 된답니다.

산소는 작물을 심는 곳은 아니지만 조상을 모시는 신성한 장소로 떼로 가꾸기에 다른 어떤 풀도 배제돼야 하는 까닭에 이곳을 기웃거리기만 해도 잡초인 것이죠. 아무래도 산속이거나 산에 가까운 곳에 자리하기 때문에 칡, 산딸기, 붓꽃, 억새, 댕댕이풀, 오이풀, 도둑놈의지팽이, 할미꽃 등 산풀 종류가 많아요. 여기에다 개망초, 쑥, 질경이, 환삼덩굴, 메, 돌콩, 며느리밑씻개, 토끼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자라는 강자들이 인간을 따라와 정착 투쟁을 벌이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나무와 풀 가운데 이름에 '개'자가 붙는 것들이 있어요. 모델이 되는 식물에 비해 모양이나 크기, 또는 품질이 떨어지는 것들이죠. 허니, 잡초 가운데 '개'가 붙은 것들은 이중으로 폄훼의 수모를 당하는 셈입니다. 가뜩이나 '쓰잘 데가 없고 웬수 같은 놈의 풀'이라고 저주스럽게 낮잡아 깎아내린 게 '잡초'란 주홍글씨가 아니던가요? 거기에다 접두사로 '개'란 몹쓸 감투(?)를 씌웠으니…,개갓, 개고사리, 개망초, 개머위, 개모시풀, 개밀, 개보리, 개비름, 개쑥부쟁이, 개취, 개여뀌, 개질경이, 개현호색, 개별꽃, 개방동사니, 개민들레, 개방가지똥, 개박하, 개돌나물, 개고들빼기 등등. 이름 앞에 '돌', '메(멥)'자가 붙은 것들도 마찬가지인데 돌밀, 돌바늘꽃, 돌삼, 돌피, 돌콩, 돌지치 등과 메기장, 메귀리, 메벼, 메조 등이 있어요. 한편 '나도'나 '너도'가 붙은 것들도 진짜와는 다른 엉터리임엔 분명하지만 '개' '돌' '메(멥)'이 붙은 것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진짜'에 가까워요. 나도냉이, 나도잔디, 나도승마/ 너도고랭이, 너도방동사니 등등.

#잡초라고 푸대접 받는 우리 친구들 가운데는 사실 정겨운 이름도 많아요. 껄껄이풀, 개쇠스랑개비, 가는다리장구채, 부지깽이풀, 꼭지연잎꿩의다리, 깔끔좁쌀풀, 깽깽이풀, 엄살풀(미모사), 족두리풀, 머리방동사니(파피루스), 뚜껑별꽃, 구슬붕이, 설앵초, 꽃마리, 바람꽃, 여우팥 등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지 않나요? 그런가 하면 요상한 단어가 들어있어 소리를 내 부르기가 뭐시기한 이름을 가진 친구들도 있어요. 며느리밑씻개, 소경불알, 개불알풀, 수자해좃, 개도둑놈의갈고리, 닭의밑씻개 등이 그렇죠.

또 같은 풀이라도 지역에 따라 달리 부르는 친구들도 여럿 있습니다. 냉이의 경우 나사이, 날생이(이상 경상), 나중개(전남), 매운개(전북), 냉냉이(평안), 꼬다지(함북) 등으로 다양하고, 민들레도 세투레(함남), 머슴들레(경상), 미느라미(전남), 문둘레(황해)로 각각 불리고 있어요. 씀바귀를 경상도에선 씬나물이라고 하는데 전남에선 씬밥통이라고 하니 다른 놈 같고, 할미꽃을 제주에선 할으비고장이라고 부르며 아예 성(性)까지 바뀐 것이 재미가 그만이에요.

#인간과 우리 잡초 사이엔 묘한 패러독스의 역사가 있지요. 인류가 위대한 건 문명을 이뤘고, 계속 이어가고 있기 때문인데 이게 다 우리들 덕분이란 사실을 아시나요? 쉽게 말하면 문명의 시초는 농업혁명, 즉 정착 농업에서 싹 텄고, 정착 농업은 잡초를 없애기 위한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보다 효율적인 잡초 제거 방법을 궁리하다보니 기술과 도구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게 바로 문명이란 것이죠.

농업혁명이 일어난 게 지금으로부터 1만 2000년쯤 전이니 인류의 역사는 곧 우리들과의 싸움의 역사인 것이에요. 초창기 농부랄 수 있는 어떤 인간이 먹고 버린 씨앗이나 줄기에서 똑같은 씨나 열매가 열린다는 걸 발견한 뒤 일부러 씨를 뿌리고 줄기를 꽂아놓은 게 농사의 시작인데 몇 달이 지나 돌아와 보니 정작 수확할 대상은 가려서 안 보이고 엉뚱한 풀들만 무성하니 뿔따구가 났을 테고, 심어놓은 작물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풀들을 없애려니 어느 결에 정착이 됐더라는 얘깁니다.

인간을 정착하게 하고 밭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게끔 한 것은 정작 작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 잡초들이었으니 우리가 인간을 길들인 거죠. 이건 세계적인 잡초학의 대가 존 카디너(John Cardina)박사의 연구 내용이에요. 그는 오늘날 기후변화와 공해 등 각종 문제의 원인 중 하나라며 주장하는 '인류세(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정의되는 지질학적 시대구분)'의 시작이 씨를 뿌릴 밭을 만드느라 덤불을 걷어내기 위해 인류 최초의 괭이로 흙을 건드리는 순간이었노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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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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