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98년에 난공불락 같았던 '일본 반도체'를 추월했지만 추격에 고삐

83년 현대전자가 설립됐다. 이미 가전 시장은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가 3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후발 업체인 현대전자가 뛰어들 여지가 별로 없었다.
정 회장의 생각은 처음부터 가전 시장이 아니었다. 현대전자는 반도체와 컴퓨터에 전력을 다했다. 국내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와 아남산업이 양분하고 있었으나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다.
대규모 물량 공세가 시작됐다. 당시 정 회장이 반도체에 쏟아부으려고 준비한 실탄이 무려 1조 원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반도체 박사들을 모셔오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100명 이상의 박사가 모여들었다.

86년에 반도체 연구소가 세워졌다. 89년에는 미국 알렌브래들리와 합작해서 '현대 알렌브래들리'도 세웠다.
현대의 무지막지한 투자에 삼성이 놀랐다. 이러다가 추월당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경쟁적으로 투자가 이뤄졌다.
삼성은 92년 64M D램을 개발한 데 이어 94년 256M D램, 96년 1G D램, 98년 128MB 플래시 메모리를 잇달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난공불락 같았던 일본을 추월한 것이다.
삼성이 멀리 도망갔지만 정 회장은 투자를 늦추지 않았다. 무려 13억 달러(2022년 환율로 따지면 약 1조 7,000억 원)를 투입해 98년 미국 오리건주 유진에 반도체 공장을 완공했다.
반도체를 '미래의 먹거리'로 파악한 정 회장의 생각은 맞았다.
하지만, 97년 말 닥친 외환 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외환 위기 상황에서 공격적인 투자가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정 회장이 김영삼 대통령을 미워한 이유는 대선 때의 악감정으로 현대를 압박한 것이 가장 컸지만 외환 위기를 초래함으로써 국가 경제를 망쳤다는 이유도 상당히 컸다.
정주영 회장이 공을 들였던 현대전자는 정 회장이 서거한 지 꼭 한 달 만에 하이닉스로 넘어가면서 그 운명을 다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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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