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격이 높은 남성복 색은 흰색 … 산업화 사회의 땀,먼지,기계에 강한 검정 색이 떠 올라
빅토리아 여왕 남편 앨버트 공 잃고,남은 생애 검은색 상복만 입어 검정색이 주색으로 등장

남성의 정장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하나의 태도이며, 시대를 관통하는 질서의 상징이다. 복장은 말이 없지만, 많은 것을 내비친다. 입은 이의 품위, 시대의 기류, 때로는 정치적 메시지까지 담는다. 그리고 그 정장의 기원에는 '불문율'이 있다.
남성들이 '갖춰 입는' 것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다. 그전까지 유럽 사회는 귀족 중심의 화려한 복장이 일상이었고, 예복과 평상복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60년대에 오늘날의 정장 형태가 등장했다. 재킷, 바지, 셔츠, 넥타이의 조합은 단순하면서도 질서정연했다. 동시에 '적절한 복장'과 '격식 있는 태도'라는 복장 에티켓이 하나의 사회적 규범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산업혁명을 거친 영국에서 비롯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의 치세 아래 영국은 산업의 발달과 제국의 팽창, 과학기술과 문화의 융성 속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새로이 떠오른 중산층은 기존 귀족의 장식을 대신할, 실용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복장을 원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이 그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게 중산층의 욕망은 곧 사회 전반의 복식 규범이 되었고, 20세기에 접어들며 남성의 정장은 '예의'이자 '신뢰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격식을 갖춘 옷은 곧 격식을 갖춘 사람을 의미했고, 어느 새 남성 정장은 반드시 지켜야 할 '무언의 약속'이 되었다.
이 '불문율'은 옷의 색에서도 드러난다. 본래 남성복에서 가장 격이 높은 색은 흰색이었다. 흰 바지, 흰 셔츠, 흰 나비 넥타이, 그리고 흰 코트였다. 그러나 흰색은 관리가 어렵고, 오로지 상류층만이 감당할 수 있는 색이었다. 산업사회 속 먼지, 기계, 땀은 흰색의 사치를 지워냈고, 그 자리를 검정색이 대신하게 된다.
검정색이 정장의 주색이 된 데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영향도 크다. 1861년, 그녀는 남편 앨버트 공을 잃고, 남은 생애 동안 검은 상복만을 입었다. 여왕의 애도는 사적인 감정을 넘어, 검정색을 '슬픔과 공경'의 색으로 만들었고, 이윽고 남성 정장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중산층은 귀족을 모방하면서 자신만의 트렌드를 만들었고, 그 스타일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정장의 틀을 완성해간다. 정장은 그렇게 '패션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이처럼 오늘날의 정장은 단지 옷에 머물지 않는다. 입는 이의 태도이자 메시지이고, 때로는 정치적 행위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있다.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평소 즐겨 매던 빨강 넥타이를 벗었다. 하지만 어두운 색깔의 정장과 흰색 셔츠, 검은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는 바티칸의 장례미사 복장 규정에 맞지 않게 비교적 밝은 계열의 파란색 정장과 넥타이를 착용해 구설에 올랐다. 2월 말, 자신과의 정상회담 자리에 정장이 아닌 군복 스타일의 복장을 입고 나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오늘 완전히 차려입었다"며 비꼬았는데, 이번에는 그 자신의 옷차림이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다.
패션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한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프레임(frame)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그래서 이 단정한 옷 한 벌은, 누군가에겐 예의이고, 누군가에겐 권력이자 시대를 상징하는 한 장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