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 반발…700년 공화정 무너지고 '황제 시대'낳아

우리가 흔히 간과하지만 로마 제국 이전에 '로마 공화국'이 있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무려 700년 동안. 귀족은 있었지만 왕은 없었고, 동등한 평민들의 목소리가 우대받던 '민주적' 정치체제였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공화정 역시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니다. 공화국의 종말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 계기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좌절이었다.
공화정을 수놓은 인물들의 행적을 다룬 『로마 공화정』(필립 마티작 지음, 갑인공방)에는 그라쿠스 형제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히 실려 있다.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군인으로 이름을 떨친 끝에 기원전 133년 호민관에 선출되었다. 평민에 의해서 선출되어 평민을 위하는 직책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즉각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로마 공화정은 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니발과의 전쟁 이래 자작농들이 오랫동안 징병되는 통에 이들의 땅은 소수 귀족들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공화국을 지탱할 '시민'들이 위기에 처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티베리우스는 귀족들에게 유상으로 귀족들의 땅을 몰수해 무산자들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숲의 들짐승도 머리를 둘 굴이 있는데 로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평민들은 공기와 햇빛밖에 없습니다…로마의 평민은 세계의 지배자로 불리고 있지만 땅 한 조각도 없습니다."
티베리우스의 개혁 명분이었고 이는 옳은 진단이었다.
그러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이에 대해 반발했다. 선거 유세 중 한 농부와 악수를 하다가 그의 손에 박인 굳은살을 보고 손으로 걸어 다니느냐고 물었던 원로원의 보수파 의원 스키피오 나시카가 선봉에 나섰다. 동료 호민관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마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려 들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토지를 아예 무상으로 몰수하겠다고 법안을 고쳤으며, 민회를 통해 옥타비우스를 해임했다. 하지만 실상 민회 의결을 통해 호민관을 파면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로, 이런 강경 조치는 불법이자 '반정부적 행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이유로 티베리우스의 정적들은 그의 임기가 끝나면 기소하겠다고 을러댔고, 토지개혁에 드는 비용 지불을 거부했다. 임기가 끝나가는 티베리우스는 기소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호민관 재선에 도전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관례에서 벗어나는 일이어서 원로원에서는 티베리우스의 출마 허용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스키피오 나시카 무리는 티베리우스가 민회를 열고 있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습격해 티베리우스 본인과 그 지지자 100여 명을 살해했다.
티베리우스의 개혁 실패는 단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 후 로마 공화정은 친그라쿠스파와 반그라쿠스파로 양분되어 스스로 종말을 재촉했으니 말이다. 2,00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개혁이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게 아니라는 첫 사례라 할까.
---------------------------------------------------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