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09:25 (화)
[김성희의 역사갈피] 석수쟁이 아들이 日총리가 된 사연
[김성희의 역사갈피] 석수쟁이 아들이 日총리가 된 사연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5.03.1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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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국내 신문에 실린 '이노우에 영어 강의록' 광고 소재로 활용
자습 통신교재지만 '3개월 내 영어로 말한다'는 과장 문구에 헛웃음
영미(英美)를 적국으로 삼아 "귀축(鬼畜·귀신과 짐승)"이라 부르던 일제강점기에도 레코드로 된 영어교재가 등장했을 정도로 영어 열풍은 예전부터 존재했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21세기 한국에서 영어를 모르고는 출세하기 어렵다. 각급 입학시험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취업 시험이나 이른바 '고시'에서 영어는 빠지지 않는다. 일상 대화에서도 툭하면 영어 단어가 등장하니 영어를 모른다면 '출세'까지는 몰라도 '배운 티' 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휴대전화로 통번역이 가능한 시대가 왔어도, 한 달에 2백만 원 이상 든다는 영어유치원이 미어터지다 못해 매끄러운 영어 발음을 위해 멀쩡한 어린이 혀를 수술한다는 '괴담'이 도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같은 영어 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영미(英美)를 적국으로 삼아 "귀축(鬼畜·귀신과 짐승)"이라 부르던 일제강점기에도 레코드로 된 영어교재가 등장했을 정도로 영어 열풍은 드셌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록 학교 수업에서는 일본어 교육에 밀려난 상태였지만 영어를 '입신출세의 무기'로 간주하는 대중의 인식은 그대로였다.

근대 상품의 광고에 초점을 맞춰 한국 소비사회의 기원을 캐낸 『상품의 시대』(권창규 지음, 민음사)에서 이런 영어 배우기 열풍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5년 전인 1936년 6월 30일 자 『조선일보』에는 영어 교재 광고가 실렸다. 헤드 카피는 "이노우에(井上) 영어 강의록"이라는 단순한 알림 형식인데 그 밑의 카피가 눈길을 끈다. "눈과 귀로부터 영어를"이라면서 "청소년 제군! 초여름(初夏)은 입신의 무기 영어를 정복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면서 "석수쟁이 아들로 총리대신이 되는 실력의 세상인즉, 더욱이 영어를 아는 것이야말로 입신의 제일 무기이다"라고 논거를 제시했다.

여기서 이노우에는 메이지 시기 활약한 일본의 정치가·외교관·기업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젊은 시절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밀항한 바도 있고, 정부 각료가 되어서는 주일 외교사절을 접대하기 위한 시설로 로쿠메이칸(鹿鳴館)을 설립했을 정도로 국제통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의 이름을 빌린 통신 영어학교의 강의록은, 지금으로 치면 '인강(인터넷 강의)'과 같은 것이었다. 직접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통신교재를 받아 '자습'하는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문자만으로 언어 학습이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이 광고는 광고 특유의 과장이 심해 웃음을 자아낸다. 무려 "1개월에 영어를 읽게 되고, 2개월에 영어를 쓰게 되고, 3개월에 영어로 대화된다. 이같이 굉장한 능수(能手)가 된다"고 장담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석수쟁이 아들'이 총리대신이 되던 시대는 일본에서도 훌쩍 지났을뿐더러 조선인으로선 조선총독도 꿈도 꿀 수 없다는 사실에는 눈감았으니 애꿎은 조선 학도들의 주머니만 어지간히 털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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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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