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문제의 애첩 진부인 희롱하다 들키자 재상과 손잡고 부왕 살해
권력 잡고 진부인과 동침하고 형도 죽여…"승진하려면 바른소리 말라"

중국의 역대 제왕은 약 600명에 이른다. 그중 수(隋)나라 2대 황제 양제(煬帝·569~618)는 가장 위선적인 인물로 꼽힌다. 맞다. 국사 교과서에 고구려 을지문덕에 패퇴한 임금으로 한 줄 등장하는 바로 그 수 양제다.
양제의 이름은 양광(楊廣). 수나라를 세운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로, 젊은 시절 영웅적 기질과 백성을 사랑하는 성현의 포부를 지닌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태자는 당연히 맏아들 양융로 정해졌는데 그는 통이 크고 호방한 성격의 난봉꾼이었다. 이에 양광은 야심을 감춘 채 우애 깊은 동생, 효성스러운 아들로 일관했다.
문제의 비 독고 황후는 첩을 둔 남자를 가장 미워했는데 양융은 첩이 많아 조강지처가 화병으로 죽게 만들었다. 또 문제는 술에 빠진 대신들을 가장 싫어했는데 양융은 날 새는 줄 모르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성격이었다. 양광은 그 틈을 파고 들었다. 양광에게는 소비(蕭妃)라는 처 한 사람뿐이었고, 문제 부부가 양광의 집을 가 보니 노비들은 모두 늙고 못 생겼으며 악기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데다 줄마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양광의 점수 따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정을 갈 때는 꼬박꼬박 입조하여 인사를 올리면서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효심을 보였다. 여기에 양광은 문학적 소양도 뛰어났고 겸손해 조정의 관리들 사이에서도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모범적 지도자'란 평이 돌았다.
결국 서기 600년 문제는 양융을 평민으로 강등해 궁궐에 감금하고 양광을 태자로 삼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병이 든 문제가 수도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인수궁으로 피서를 간 604년 양광은 부황을 시해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황위에 오른다. 발단은 문제가 총애하는 진부인을 양광이 희롱한 것이었다. 진부인의 호소를 들은 문제가 양광을 소환하자 양광은 도리어 재상 양소와 손잡고 문제를 침실에서 끌어내 죽여버렸다.
양광이 권력을 잡은 뒤 맨 처음 한 일은 아름다운 서모(庶母) 진부인을 찾아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었고 그 다음은 형 양융을 죽인 것이었다. 양광은 황제 계승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 위장해온 끝에 야심을 이룬 것이었다. 이를 보면 양광의 능력 자체는 만만치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15년간 재위하면서 별궁을 40여 군데나 짓고, 달구경을 갈 때 궁녀만 수천 명이 따를 정도로 사치스럽고 호색한 생활을 거듭하면서 고구려 정벌 등 과대망상증을 보였으니 그 말로가 순탄할 리 없었다. 수나라가 5대 39년 만에 망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 수 양제였다.
『맨얼굴의 중국사 3』(백양 지음, 창해)에 그 양광이 한 말이 실렸다. "나는 천성이 반대 의견을 듣지 못한다. 바른 소리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들이 충성스럽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가장 견디지 못한다. 승진하고 싶으면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그러니 나라 꼴이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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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