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는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길어 내리 뛰기는 '젬병'이어서 산 위에서 아래로 몰아야

#농한기(農閑期)가 있던 시절 남정네들의 겨울나기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사냥이었다. 요즘이야 그 흔한 참새 한 마리도 멋대로 잡았다가는 야생생물보호법인가 뭔가에 위반죄로 때갈 판이지만 그때는 재미삼아 하는 어른들의 놀이였다.
사냥은 생계를 위해 죽기 살기로 하는 게 아니어서 육ㆍ해(수)ㆍ공 모두에 즐길 만큼은 늘 널려 있다시피 했으니까. 특히 우리 동네는 광릉산을 등지고 앞으론 수락산, 불암산을 마주하는, 삼태기처럼 산에 둘러싸인 까닭에 별의별 짐승과 새들이 많았다.
아시다시피 광릉산은 조선의 일곱 번째 왕인 세조의 능침이 조성되기 그 이전부터 있어 온 숲이 능이 들어서면서 더 엄격하게 보존 관리돼 지금까지 원시 자연 상태나 마찬가지인 곳. 어릴 적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어른들을 따라 산나물을 하러, 또는 도토리를 주우러 가거나 친구들과 벚, 머루, 다래, 박달, 산딸기 등을 따먹으러 숱하게 드나들었던 터라 골짜기 골짜기가 눈에 선하다.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햇빛이 쨍쨍한 대낮에도 마치 달밤인 듯싶고, 숲 바닥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쌓인 낙엽들로 덮여 두꺼운 스펀지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애기 팔뚝만큼이나 굵게 살지고 어른 허리춤에 찰 정도로 키 큰 고사리와 고비가 넘치고, 참취도 이파리가 손바닥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널널하고 연했다. 가을철이면 숲 전체에 도토리가 넘쳐나 아름드리 한 나무에서만 대여섯 말은 너끈하게 주울 수 있었고,
이따금 전날 밤 꿈이 좋을 때면 목청도 서너 말씩 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러니 산돼지, 노루, 오소리, 너구리, 고슴도치, 산토끼, 고라니 등 짐승들은 물론 그 유명한 크낙새를 비롯해 꿩, 비둘기, 청둥오리, 매, 부엉이, 어치, 콩새 등 텃새와 황새, 두루미, 해오라기, 백로, 왜가리, 뜸부기, 뻐꾸기, 따오기, 논닭 등 각종 철새들도 숲과 기슭 논밭, 개울가에 흔했다.
시인 백석(白石· 1912~96)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에서도 오지인 '여우난골(=여우가 나오는 고을)'이라는데 우리 동네는 서울 근교임에도 그에 못지않았다.
#겨울철 사냥 가운데 가장 흔히 했던 것은 산토끼 잡이다. 우선 다른 사냥감들에 비해 수적으로 많았던 데다 그리 멀리 가지 않고 뒷산 일대에서도 충분한 수확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놈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뿐만 아니라 습성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다는 게 산토끼 사냥의 매력이었다. 산토끼 잡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깊은 함수관계가 있는 '동계스포츠'다. 눈의 질과 양이 절대적이다. 가장 좋은 건 함박눈이 많이 쏟아져야 한다. 그리고 녹지 않을 만큼 추위가 계속 돼야 한다. 왜냐하면 토끼가 남기는 발자욱을 추적해 잡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함박눈은 날씨가 춥다가 한참 누그러져 영상권에 가까워질 때 내린다는 건 시골에 살면 강아지도 안다.
그래서 제법 송이가 굵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하늘을 쳐다보며 어림을 잡고 하나 둘씩 마을방으로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날리는 품으로 보아 눈이 얼마나, 언제까지 내릴지 저마다의 '통박'을 주장하다 이러구러 입이 모아지면 단박에 거사(?)계획이 구체화된다. 사냥 준비물이며 먹을 궁리까지. 대개 최소한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는 돼야 하는데 눈이 그치고 하루나 이틀쯤 지나야 좋다. 눈이 쌓이면 토끼들도 제 집에 죽치고 있다가 하루 이틀 굶으면 허기를 참지 못하고 요기를 하러 굴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라 이때를 노리는 게 토끼잡이의 기본이자 요령이다. 그러니 눈발이 계속되면 토끼의 발자국도 덮이게 돼 추적이 불가하고, 또 눈이 그친 뒤 너무 추우면 쌓인 눈의 표면이 얼어 흔적이 남지 않
아 헛걸음을 할 수밖에 없으니 하늘의 뜻에 성패가 달린 게임이 바로 토끼 사냥이다.
산토끼는 양지바른 산비탈의 큰 소나무 밑둥이나 바위 밑에 굴을 파고 산다. 특히 흙이 포슬포슬하니 물기가 없는 곳을 좋아한다. 예로부터 교토삼굴(狡兔三窟)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굴이 세 갈래인 건 아니고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침입자를 감시하기 쉬운 곳에 터를 잡고 산다. 토끼 굴 주변엔 키 작은 떡갈나무 가 많은데 침입자가 스치면 부스럭 소리가 제법 요란하기 때문에 마치 전자감응 경보장치처럼 활용키 위한 지혜이다. 유난히 커다란 귀를 쫑긋쫑긋하면 청력 안테나로서 기막힌데 이런 '풍수지리'의 묘리(妙理)까지 터득했으니 초식동물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본능일 테지만 가히 '교토'란 소리를 들을 만하다.
겨울동안엔 풀이 없어 주로 나무의 뿌리를 먹고 사는데 칡이나 싸리나무, 청미래덩굴 등을 좋아한다. 표고 등 마른 버섯과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苓), 다람쥐가 숨겨놓은 도토리와 밤 등은 아예 특식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굴에서 나와 눈을 뚫고 찾아가는 곳은 해가 잘 들어 땅이 깊이 얼지 않으면서도 키가 작은 다북솔과 떡갈나무, 싸리나무 등이 무리 진 등성이나 가파르지 않고 밋밋하게 퍼진 비탈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곳을 찾아 산토끼 사냥이 시작된다.
#산토끼 사냥에 필요한 채비는 대부분 옭무(예전엔 '올무'를 이렇게 썼다!)를 만들기 위한 '삐삐선(PP선=군용전화선)'과 나무로 만든 작대기면 충분했고, 사냥총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젊은이 네댓이 한 패를 이루는데 대충 어디어디를 훑어야 하는지 빠꼼이들인 데다 족보가 있는 사냥개는 아니지만 집집이 기르는 '쭁'이나 '도꾸'도 주인 따라 한두 마리 거들기 마련이어서 아무리 눈 속이라도 산토끼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단 산토끼를 발견하면 한 조는 그 놈이 튄 자리에 청솔가지를 꺾어 조그만 동굴을 짓고 준비해간 전화선으로 옭무를 만들어 그 안쪽에 설치한다. 옭무는 만들기가 쉬워 전화선의 한 끝에 올가미를 만들고 다른 끝을 굵은 나무둥치에 묶어 놓으면 된다. 야생돌물은 올가미에 모가지나 다리가 걸리면 빠져나가려고 무조건 앞으로만 돌진하는 직진성(直進性)이 있어 이를 이용하는 것이다. 옭무를 설치하는 사이 다른 조는 달아나는 산토끼를 좇아 추적을 시작하는데 '도꾸', '쭁'을 앞세워 소리치며 눈밭을 내달린다. "쭁, 도꾸 물어라 쉭쉭~!"
토끼몰이에는 한 가지 철칙이 있다. 반드시 산 위에서 아래로 몰라고 하는 것이다. 산토끼는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길어 오름 뛰기에는 선수지만 내리 뛰기에는 젬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급한 나머지 내리 달음박질하던 산토끼가 곤두박질치며 비탈 아래로 구르다 다시 몸을 추슬러 세운 다음 비~잉 에둘러 산꼭대기로 도망치곤 한다.
다른 사냥에서도 그렇지만 산토끼 잡이는 사냥감과 사람 사이에 지구력과 인내의 싸움이다. 산토끼란 놈은 묘하게도 한참을 달아나다 꼭 멈춰 서서 뒤돌아보는 습성이 있다. 지쳐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처럼 추적자를 놀리려는 자만(自慢)에서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때가 사냥꾼들한테는 절호의 기회다. 총이 있으면 표적이 정지한 상태가 되는 것이니 그만큼 맞추기 쉬울 테니까. 또 지팡이 삼아 들고 다니던 끝이 뾰족한 작대기를 창으로 써먹기에도 딱 맞춤이다.
#예전에 우리 마을엔 엽총은 아예 없었고 공기총만 한 자루 있었다. 그런데 토끼잡이에는 산탄이 아니라 외알이어야 하는데 탄알을 구하려면 서울까지 다녀와야 하는 번거로움뿐 아니라 값도 만만치 않아 주인이 끼지 않는 한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해서 정작 사냥에는 고물상에서 쇠파이프 등을 구해 만든 사제엽총이 동원되곤 했다. (*화약은 어린이 딱총용을 까서 쓰고, 탄알은 납을 녹여 만들었다. 쇠파이프로 만든 총신이 터지면서 형 친구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 뒤로 우리 계에선 사제 총이 사라졌다!)
#첫 번째 사격이나 투창이 실패할 경우 또 다시 산토끼는 달음질 치고 사람들과 개들은 뒤를 좇는 추적이 벌어진다. 여기서 또 한 번 토선생의 묘한 습성이 나오는데 결국 이 때문에
자신을 게임의 '루저(loser)'로 만들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영어로 사냥으로 얻은 수확물을 game라 한다!) 그 잔머리(?)같은 습성은 바로 산마루를 돌아 마침내 맨 처음 도망치기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반복성이다. 아무래도 다급히 달아나다보면 본능적으로 평소 익숙한 곳이 편해 그럴 테다. 험악하게 짖어대는 개들을 앞세운 집요한 추적에 산토끼는 산을 한 바퀴 돌아 끝내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는 청솔가지 동굴 속으로 몸을 숨기는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다. 무엔가 잘못됐다 싶어 달아나려고 용을 쓰면 쓸수록 더욱 조여 오는 죽음-.
산토끼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들은 단지 승자의 전리품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를 거둘 뿐이었다. 이렇게 서너 행보를 치다보면 다리가 무거워지고 어느덧 어슴푸레 저녁이 다가오지만, 못 해도 두세 마리는 전과를 올린 터라 하산길이 가뿐가뿐 왁자지껄하다. 이날 청년들의 소굴(?)인 마을방에선 토끼볶음과 토끼 탕을 안주삼아 밤이 깊도록 술판이 벌어졌다.
#요즘 같으면 밀렵이다 총포법 위반이다 해서 콩밥 먹을 일이지만 국민학교 교과서에 노루몰이 수필이 실리고, 우리 학교에서도 가을 수확이 끝난 늦가을 고학년(4,5,6 학년)생이 모두 동원돼 노루몰이 행사를 벌이곤 했는데, 그 시절 얘기다. 눈이 바람에 쓸려 메워진 허방다리에 빠지고, 잘못 눈처마(cornice)를 디뎠다가 깊은 골짜기 굴청에 처박히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던 추억인 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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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