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친이 시민이어야만 아테네의 시민으로 인정 받도록 '법 제정' 주도
독재의 가면 쓴 정책 평가도…인기영합 코드 정치, 정당성 근거 안돼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 둔다.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 자체가 그리스어의 demos(민중)과 권력(kratia)의 합성어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그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기원전 495?~기원전 429) 치세에 정점에 달했다. 적어도 고교 시절 세계사 수업시간에 그렇게 배운다(요즘은 세계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듣긴 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탁월한 군 지휘관이자 웅변가였던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0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와의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승리를 이끌었고, 빈민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하는 등 눈부신 치적을 쌓았다.
한데 국내 서양고대사 전공자들이 합심해 써낸 『인물로 본 서양 고대사』(허승일 외 지음, 도서출판 길)을 보면 페리클레스의 영광에 대해 약간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게 된다. 우선 당시 아테네인의 정치지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곡물 생산이 유리했던 평야 지대의 지주 중심 기득권층, 해상교역으로 부를 일군 상인·수공업자 등 신흥부유층 그리고 농사지을 땅도 교역에 투자할 자금도 없는 산악지역의 소작인·노예 등 빈민층은 저마다 이해관계가 달랐다.
페리클레스의 주요 지지층은 빈민들이었는데 그는 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한 후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의 맹주로 떠올랐는데 페리클레스는 다른 동맹국들에 공납금을 강요하고, 이 기금을 아테네로 옮긴다. 국제 정치의 망나니였다 하겠다.
이를 바탕으로 페리클레스는 빈민(thetes)들이 수병으로 활약할 수 있는 길을 텄고, 덕분에 아테네는 강력한 수군을 바탕으로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테네 시민들 중 2만 명에 달하는 빈민의 절반이 그 혜택을 누렸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다. 법정 등 공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이도 페리클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두고 "판관으로 선발되고자 원하는 사람들은 잘사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언제나 '일반인'이었기 때문에" 법정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지적했다.
기원전 447년부터 432년까지 무려 15년간에 걸쳐 진행된 파르테논 신전 건축을 통해 막대한 금액을 시중에 풀어 시민들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었으니 이들은 페리클레스의 든든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451년에는 양친이 시민이어야만 아테네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법의 제정을 주도했다. 이 법에 따라 5천 여명이 노예로 팔렸으니 아테네 시민이란 '특권'을 갖게 된 이들이 얼마나 열광했을까.
책에서 페리클레스를 다루는 글의 제목이 '민주정치의 완성인가, 독재의 가면인가'이면서, "오늘날 민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코드 정치가 곧 모든 정당성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정치가에게 타산지석을 보여준다"고 맺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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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