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유학한 '문학사 (文學士)'의 구직 호소와 수험생의 혈서 소동도
근대사회의 개막은 곧 '학벌사회의 개막'이라는 지적은 타당해 보여

대입 수능시험이 지난주에 치러졌다. 수험생과 그 부모들의 타는 마음을 논외로 한다면 올해는 비교적 큰 사고 없이 지나간 듯하다. 어쨌든 언론의 수능시험 관련 뉴스를 보다가 1930년대 이 땅에서 벌어졌던 입시 풍경이 떠올랐다. 『한국 근대사 산책 9』(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를 통해서다.
당시는 식민지 조선의 민초들로선 참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일본의 조선의 식민지 지배는 20년이 지나 제법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갈수록 기세를 올리던 일본제국은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던 때였으니 말이다. 출구가 막힌 조선인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일본 유학이 늘어나자 조선총독부가 나서 유학생을 통제하려 나섰을 정도였다. 한데 유학을 하고 온들 변변한 일자리도 없을 정도로 조선의 현실은 막막했다.
"집에서는 졸업을 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가지고 오는가 하여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한 덩이 밥을 찾느라고 시커먼 손을 높이 들고 달려드는 군중이 있는 이 때……그와 같이 날뛰지 아니하고는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이니……만일 형이 자리를 주선해주시면……"
이건 1931년 공개된, 도쿄 유학에서 돌아온 '문학사(文學士)'의 호소 편지다. 불과 100년도 채 안 된 옛날 글이지만 당시의 인문계의 취업난을 짐작케 한다. 이러니 '막스 보이' '엥겔스 걸'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에 기울거나 은둔 혹은 퇴폐적 생활로 내몰리거나 공개채용을 하는 행정관료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했겠다.
그러나 출세의 지름길이라 할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총독부 고등관료가 되기란 쉽지 않았으니 1938년 총독부 본청의 고등관 230명 가운데 조선인은 12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이런 사실을 보여준다.
취업난이 이토록 심했으니 이를 뚫기 위한 입시경쟁은 중등학교 때부터 치열했다. 1934년 대전에서는 입학시험에 낙방한 19세 소년이 할복자살했고, 1937년 청진에서는 수험생이 작문시험 답안지에 연필 깎는 칼로 손등을 갈라 여기서 흐르는 피로 "낙방하는 경우에는 자살하겠다"는 혈서를 써서 냈다. 한데 이 학생은 불합격했는데 이게 겁이 난 교장이 수시로 학생을 찾아가 위로하는가 하면 경찰이 한동안 이 학생 주위를 경계하며 불상사를 막으려 했단다.
책에 인용된 천정환의 연구에 따르면 당대 출판시장에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전과'라는 이름의 학습보조서와……(중학교) 입시준비를 위한 각종 문제집이 허다하게 팔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의 보통문관시험·순사시험 응시자들을 위한 교재들도 따로 만들어져 팔렸다고 한다. "근대 사회의 개막은 곧 학벌사회의 개막이기도 하였다"는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과연 지금, 이 땅의 수험생들은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것일까.
---------------------------------------------------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