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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역사갈피] 일본의 저력 '히비야 고등학교'
[김성희의 역사갈피] 일본의 저력 '히비야 고등학교'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4.05.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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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 정책' 도입 되기 전 재학생 절반이 도쿄대 진학한 명문중의 명문
개교기념일 천황의 학교 방문 일정 학생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담임 선생님도 학생들이 선택
日경단련 회장"선배중에 고관,대기업 사장 즐비하나 사회에 이바지한 사람 없다" 격문 눈길
도쿄 중심부에 자리 잡은 히비야고교는 1878년 문을 열었는데 196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정책'이 도입되기 전까지 일본 최고의 명문 공립 고등학교로 꼽혔다/사진=일본 히비야고등학교/이코노텔링그래픽팀.

『1940년 체제』(노구치 유키오 지음, 글항아리)란 책이 있다. 얼핏 제목을 보면 이념 서적 같지만 일본의 전후 경제발전사를 개인적인 일화와 더불어 녹여낸 일종의 경제사 책이다.

일본 경제정책의 사령부라 할 대장성의 관료로도 일했으며 패전 후에는 대학교수를 지낸 일본의 대표적 경제학자가 썼다. 핵심은 한마디로 전후 일본의 경제발전은 제국주의 시대의 국가 주도 총력전 태세라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인데 정작 눈길이 간 것은 지은이가 다녔다는 히비야(日比谷)고등학교를 이야기한 대목이었다.

도쿄 중심부에 자리 잡은 히비야고교는 1878년 문을 열었는데 196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정책'이 도입되기 전까지 일본 최고의 명문 공립 고등학교로 꼽혔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960년대 초반엔 재학생의 절반에 해당하는 195명이 도쿄대에 진학했다.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 노벨 의학상을 받은 도네가와 스스무,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등 졸업생의 면면이 화려한 것은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 이색적인 것은 최남선, 최린 등이 구한말 황실특파유학생으로 히비야고교에 다녔다는 사실이다.

이래저래 고교 평준화 이전 한국의 경기고교에 비할 만한 명문인데 이 책에 소개된 히비야고교의 교육방침이 놀라웠다. 책의 지은이는 1956년 입학했는데 교장 선생님은 "영국 이튼 스쿨을 본보기로 삼아 제군들을 신사로서 대한다. 신사의 자각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축사를 했단다. 그러기에 개교기념일에 예정되었던 천황의 학교 방문이 학생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고, 2학년부터는 반 편성을 학생 주도로 하면서 담임선생님도 학생들이 선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수업도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선생님은 창가에서 졸고 있었는가 하면 지은이의 옆 반에서는 국어 선생님을 "무능하다"며 내쫓아버린 일도 있단다.

그런가하면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소련에 항의하기 위해 헝가리로 반 대표를 보내기로 결의하기도 했다니 예나 지금이나 혹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젊은 학생들의 현실참여 욕구는 못 말리는 형편인가 보다.(여비를 마련하지 못해 결국 결의만으로 끝났단다.)

인상적인 것은 경단련(우리로 치면 전경련) 회장이었던 이시자카 다이조가 학교 축제에 와서 띄웠다는 격문이다.

"제군의 선배 중에 정부 사무차관이나 대기업 사장, 도쿄대 교수가 지천이다. 그러나 사회에 이바지한 사람은 없다. 너희는 선배들을 결코 본받으면 안 된다." 이 대목에서 학력보다 인성을 우선시하는 것이 일본의 저력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준화 이후 시들했던 히비야고교는 국가경쟁력 저하를 우려해 2003년 부활한 학교별 단독 선발제에 힘입어 옛 영광을 되찾을 조짐이라고 한다. 학생인권조례의 폐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한창인 우리 현실을 떠올리면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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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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