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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㉒영화속 '푸이'의 몰락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㉒영화속 '푸이'의 몰락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4.06.13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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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이기적이고 낭비벽이 강한 권력자로 묘사하기위해 일부 내용 역사왜곡
유럽이나 미국으로 망명을 희망 했던 그는 소련 당국에 잘 보이기 위해 보물 헌납

1988년 제60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마지막 황제>를 위한 무대였다. 당연했다. 무려 9개 부문에서 상을 받지 않았나.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으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훌륭한 영화가 됐다. 역사적 시각에서는 어떨까? 여전히 '훌륭한 영화'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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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시 영화 <마지막 황제>는 평단과 관객 모두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대부분의 언론도 칭찬 일색이었다. 1987년 10월 7일자 『버라이어티(Variety)』는 영화에 대해 "독특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각적 화려함을 지녔다"고 극찬했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1987년 12월 9일 자 『시카고 선 타임스(Chicago Sun-Times)』에서 "20세기 중국 역사의 모든 모순과 역설을 구현한 한 남자의 삶에 대해 단 한 가지만 말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아카데미상 9개 부문 수상'이라는 영예도 그래서 얻어진 것일 게다.

그렇다면 역사적 시각에서도 같거나 비슷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굳이 영화에 대해 역사학자가 평가한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것도 없다. 푸이와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의 스승 레지날드 F. 존스톤(Reginald Fleming Johnston)이 쓴 두 권의 자서전만 봐도 영화에 대한 역사학적 평가는 종결된다. 한 마디로 도저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역사 왜곡이 즐비한 탓이다. 그중에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내용도 있다.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는 푸이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는 푸이

우선 그나마 가벼운 것부터 보자. 거론 안 해도 될 법한 역사 왜곡. 영화에서는 존스톤이 5ㆍ4운동 당일 또는 그 직후인 1919년 5월 4일 또는 그 직후 부임한 것으로 돼 있다. 젊은이들이 들고 있던 현수막에 '21개조 반대'라는 문구로 이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틀렸다. 존스톤은 5ㆍ4운동 발발 전인 1919년 3월에 부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존스톤의 부임과 5ㆍ4운동을 연결시켰던 것은 영화 전반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저 영화의 극적인 전개를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것 하나 더. 푸이가 자금성에서 추방당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푸이가 테니스를 치던 중 소속 모를 군인들에 의해 자금성을 나가라는 통지를 받은 것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푸이가 자서전에서 쓴 내용은 다르다. 그 시점에 대해 "오후 9시 무렵 저수궁(儲秀宮)에서 완용(婉容, 황후)과 과일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고 썼다. 존스톤은 당시 자금성에 없었다. 이 같은 영화적 처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확실한 이유를 찾기 어려운 탓이다. "푸이가 서구화되는 과정에서 쫓겨나 안타깝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 이제 '심각한 사례'다. '심각하다'는 뜻은 세 가지. 첫째는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왜곡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왜곡이 '특정 목적'을 위해 일관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목적'이란 다른 게 아니다. 푸이에 대한 '연민(憐愍) 일으키기'다. '연민'이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의 의미. 관객동원을 위한, 즉 '상업적 목적을 갖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다.

보자.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전범 수용소 한 간부가 푸이에게 '궁중개혁'에 대해 묻는다. 왜 개혁을 했느냐는 것이다. 영화는 푸이가 그 동안의 부정과 비효율을 없애려 했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자서전에 나와 있는 답은 다르다. 우선 그는 자서전에서 "대신과 관리들은 하사품의 형식으로 물건을 빼내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 "나는 그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며 "다른 사람이 내 재산을 훔쳐가고 있다는 것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개혁은 단지 자기 개인 자산을 지키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단행됐다는 것이다.

■ 역사 왜곡 … "푸이에게 연민을"

신하들로부터 재산 지키기에는 철저했지만 정작 자신의 낭비벽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다. 자서전을 통해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확실한 성향 중 하나는 '낭비벽'이다. 자금성을 떠나기 직전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내무부의 지출이 너무 많다고 질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제한으로 돈을 섰다"는 것이다. 자서전에는 서양개의 사진을 보고 외국에 나가 같은 개를 사오라고 지시했다는 내용도, 또 개 먹이도 해외에서 주문해 쓰도록 명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 같은 내용은 확실히 푸이에 대한 '연민'을 방해하는 요소다. 하지만 삭제된 '연민 방해 요소'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어린 황제 푸이에게는 보호자가 없는 것처럼 묘사됐다. 영화는 늘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가 정을 나눌 대상은 오직 한 명, 유모였다. 하지만 틀렸다. 푸이에게는 진정한 보호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재풍이었다. 그가 어린 푸이를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며 그를 키웠다. '아버지'라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었던 것이다.

비(妃)였던 문수는 영화에서처럼 푸이의 사랑을 받지 못해 떠난 것일까? 아니다. 푸이가 그를 쫓아냈다. 푸이는 4명의 처첩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도 '아내'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들은 모두 그저 노예였을 뿐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또 하나. 과연 황후가 낳은 아이는 일본군 의사에 의해 살해됐을까? 이 역시 '연민 끌기'를 위한 소품에 불과하다. 푸이의 자서전을 보면 어디고 황후가 아이를 낳았다는 내용은 없다.

왜 베르톨루치 감독은 이 같은 내용을 다루지 않았을까? 이유는 뻔하다. 푸이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줄이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낭비벽이 강한 권력자가 고꾸라지는 모습에서 관객은 연민보다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민보다 반감을 갖게 되는 푸이의 실제 모습은 이보다 훨씬 많다. 물론 이 같은 사례는 영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됐고 은닉됐다. 이제 푸이에게 반감을 갖게 될 더 많은 사례를 찾아보자.

일본 항복 직후 일본으로 도피하는 비행기 안의 푸이
일본 항복 직후 일본으로 도피하는 비행기 안의 푸이

일본의 패전 소식에 푸이는 일본인과 함께 비행기로 일본에 가려 했다. 하지만 마침 폐인이 된 황후 완용이 찾아온다. 황후를 보는 푸이의 눈빛이 애절하다. 하지만 정작 비행기에는 황후가 없다. 왜 같이 가려 하지 않았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자서전에는 있다. 일본인 장교가 비행기가 너무 작아 수행원을 몇 명만 추리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친동생과 조카, 의사, 시종 등을 선택했다. 푸이는, 영화의 애절한 장면과는 달리, 황후를 버렸다. 황후는 매달렸지만 푸이는 단호했다. "비행기가 작으니 기차로 오라"고 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영화에 등장했다면 영화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매국적 친일행각도 빠져 있다. 일본을 두 차례 방문한 푸이는 청조의 자존심을 버리고 일본 천황을 마치 '아버지'처럼 대우했다. 그가 자서전에서 쓴 내용을 보면 처음 일본을 방문했던 1935년 4월에는 일본 천황을 동격으로 여겼다고 했다. 하지만 1940년 5월 두 번째의 방일 때는 얘기가 확 달라진다. 일본 황실의 시조라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을 받들겠다고 약속했고 또 귀국 후에는 직접 신사참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신도(神道) 보급에까지 적극 나섰고 1940년대 대동아 전쟁에서 그는 "만주국의 전력을 다해 어버이의 나라인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겠다"는 충성서약까지 맺는다.

일본 패전 후 중공 전범수용소에 가기까지 5년 동안의 소련 생활도 생략됐다. 베르톨루치는 이 대목을 왜 빼먹은 것일까? 이 시기는 그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이유는 한 가지. 베르톨루치가 노리는 관객의 동정을 받을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푸이의 소련 생활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일생 동안 놀며 쓰기에 충분한 보석 장신구를 갖고 있었다"며 "시종 허세를 버리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유럽이나 미국으로 망명을 희망했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잡고 있었던 소련 당국에 잘 보이기 위해 경제 건설을 지원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보물 일부를 헌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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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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