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15:00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㉑미중수교와 베르톨루치 감독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㉑미중수교와 베르톨루치 감독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4.05.20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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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미국선수들 중국 방문
'핑퐁외교'가 물꼬트자 석달 뒤 키신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극비 방중해
이듬해 닉슨방중 7년뒤 수교…1984년 사회주의자 베르톨루치 감독 중국행

<마지막 황제>의 탄생에는 눈길을 끄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79년 미중수교다.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국과 한층 가까워졌다. 베루톨루치 감독 눈앞에 일생일대의 기회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잘 알려진 사회주의자였다. 이로써 중국 당국 설득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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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루치 감독이 영화 <마지막 황제>에 관심을 갖게 된 때가 '1980년대 초'라 했다. 그렇다면 생각나는 게 있다.

미국과 중국이 펼친 이른바 '핑퐁외교'다. 그 시작은 1971년 4월이었다. 이때 개최된 제31회 나고야(名古屋)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미국의 선수와 기자 등 10여 명이 대회 후 중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해 7월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고 이어 다음해 2월에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간다. 가까워진 양국은 1979년 전격적으로 수교를 한다.

이런 상황이니 세인의 관심이 중국에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베르톨루치 감독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가 사회주의에 매몰돼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중국에 대한 그의 관심이 컸을 것으로 추정한 건 어렵지 않다. 본격적인 준비는 1984년 시작된다. 그해 중국을 방문한 베르톨루치 감독은 이후 3년 동안 영화 제작에 매달린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도 컸다. 미중 수교가 화제였던 차에 미국의 저명한 영화감독이 직접 중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아닌가. 할리우드 최초의 중국 현지 로케 영화였다.

제작비 또한 파격적이었다. 무려 2400만 달러다. 한해 전 올리버 스톤 감독이 만들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한 월남전 영화 <플래툰(The Platoon)>을 보자. 제작비가 겨우 6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돈을 앞세워 물량 공세도 엄청났다. 미국ㆍ영국ㆍ중국ㆍ일본 등 6개국에서 60명 넘는 배우와 2만 명의 엑스트라가 차출됐다. 의상은 어떤가. 화려한 중국 청나라 복식과 일본 군복 등 9000벌에 이르는 의상이 관객의 눈을 홀렸다.

음악감독 사카모토 류이치. 아시아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음악감독 사카모토 류이치. 아시아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관객과 비평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금단의 자금성은 비밀의 옷을 벗었고 수 만 엑스트라가 파노라마와 같은 놀라운 씬을 펼쳤다. 특히 세 살 먹은 어린 황제를 목욕시키고 함께 웃으며 놀아주는 환관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 환관들이 황권을 농락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배우들이 한 몫을 더 한다. 주인공 푸이 역의 존 론은 10대에서 60대까지, 황제에서 평범한 조경사까지 아우르는 탁월한 연기를 보여줬다.

음악도 뺄 수 없다. 중국풍의 묵직하고 슬픈 음악은 왜 일본 음악감독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에게 아카데미상을 줬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러닝 타임 3시간 가까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느끼는 데에는 음악도 한 몫을 한다. 영화가 지금까지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과거 세 차례 내한공연에서 티켓이 전 회 매진되는 등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 사회주의자 베루톨루지, 중국 개방에 큰 관심

영화는 1950년 공산당 치하의 중국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1950년이면 마오저뚱(毛澤東)의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고 쟝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타이완(臺灣)으로 쫓아낸 다음해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전범(戰犯) 열차에는 마지막 황제 푸이도 있다. 삶을 포기한 그는 열차에서 내려 화장실에서 사살을 시도한다. 이때 문을 열라는 외침이 그를 과거를 데려간다. 1908년 베이징(北京). 당시의 실권자 서태후(서태후)로부터 황제 등극을 명령받은 전령이 푸이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오던 때다. 당시 그의 나이 만 세 살이었다.

영화는 이중구조의 플롯으로 진행된다. 1950년 전범수용소에 뒤 죄를 자백하고 재판받고 10년 대 출소해 수 년 동안 정원사로 살아가는 삶이 '현재'다. 자백 과정에서의 회상이 중국 황제에서 시작해 만주국 꼭두각시 황제로, 그리고 일본의 패전 후 러시아 포로로 잡혀 살다가 중국 전범 수용소로 끌려오게 되는 과정까지가 '과거'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푸이의 삶을 조망한다. 그리고 그가 황제가 된 1908년부터 정원사로 살다 사망한 1967년까지의 60년 중국 역사를 그려나간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일본 역사, 특히 1929년의 대공황과 1930년대 및 1940년대의 일본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역사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일 수 있는 영화다.

어린 황제의 동생이 이제 형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는 장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했음을 의미한다. 선통제의 나이 여섯 살 때 얘기다. 영화에서는 빠져 있어 아쉽지만 우리는 당시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때 임시 총통은 장개석이었으나 청의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군사력에 밀려 그에게 총통 자리를 내 준다.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퇴위시키고 청조를 끝장낸다는 조건이었다.

조건은 이뤄진다. 위안스카이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밀약을 체결한다. 어린 푸이는 당연히 이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다뤘듯, 위안스카이는 완전히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새 왕조를 열고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위안스카이는 매국도 서슴지 않는다. 1915년 남만주에 대한 이권의 확장과 강화, 독일이 보유하던 산둥반도에 대한 권리 이양 등을 담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황제 즉위에 일본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1919년 5월 푸이의 가정교사 레지노 F. 존스톤(Reginald F. Johnston)이 발령받는 장면이 나온다. 5ㆍ4운동, 즉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19년 중국에서 터진 반(反)제국ㆍ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이 배경이다. 이때 존스톤이 베이징 거리를 지나는데,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시위를 벌인다. 이때 이들이 들고 있던 현수막를 잘 보라. '21개조 반대'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이 혁명운동으로 일본의 '21개조 요구'는 무산된다.

몇 년 뒤 황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는 장면도 있다. 1924년의 일이다. 영화에서 황제를 쫓아내는 군인들은 당시 국민당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 수하들이었다. 펑위샹은 중국 근대사에서 유명한 군벌 직례파(直隷派) 소속이었다가 또 다른 군벌이었던 봉천파(奉天派)와의 전쟁에서 돌연 반기를 들어 베이징(北京)을 정령하고 일시적으로 국민당을 따랐던 인물이다. 이후 만주의 군벌 장쭤린(張作霖)과 격렬한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존스톤이 자금성 교사로 가는 길에 그의 눈에 띈 시위대. 일본이 요구한 ‘21개조를 취소하라’는 문구가 있다.
존스톤이 자금성 교사로 가는 길에 그의 눈에 띈 시위대. 일본이 요구한 '21개조를 취소하라'는 문구가 있다.

자금성에서 쫓겨난 황제는 그야말로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일단은 톈진(天津)으로 갔지만 이곳에서도 곧 쫓겨날 운명이었다. 1925년 쑨원(孫文)의 사망으로 그의 뒤를 이은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을 몰아내고 톈진에 왔던 것이다. 1927년 그는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일본영사관이 있던 '일본인 보호구역'으로 갔다. 그리고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푸이의 삶은 또 한 차례 격변을 겪는다. 만주를 점령한 뒤 일본이 그를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1932년 3월 만주국 최고 권력자인 집정(執政)이 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34년, 그는 만주국 황제로 추대된다. 하지만 철저한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가 일본에 의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영화에서 푸이는 "나를 이용하려는 일본인을 역이용하여 잃어버린 왕위와 권위를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하지만 이는 베르톨루치 감독의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푸이 스스로도 자신이 '꼭두각시 황제'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그도 망한다. 망명길에 나선 직후 소련군에게 체포됐고 1950년 공산당이 들어선 중국 본토의 전범수용소로 간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조국에 돌아온 것이다. 마침내 영화의 두개 플롯은 하나로 만나 합치되고 1959년 새로운 인물 푸이가 등장한다. 황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평범한 인민 정원사가 되어 사회로 돌아온다. 또한 영화는 그가 그토록 꿈꾸던 자유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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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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