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혜택은 모두 누리지만 정작 개혁주도 인물은 개혁에 치어버린 사례로 꼽혀
상앙(商鞅·?~B.C 338)이란 인물이 있다. 중국의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에서 10년간 재상을 지내면서 부국강병책을 착실하게 추진해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닦은 유능한 정치가이다.
그가 정책을 펼치는 과정이 꽤나 거칠었는지 개혁을 뜻하는 '변법(變法)'이란 역사적 용어를 남기기도 했다.
상앙은 본래 위나라 귀족 출신이었지만 진 효공의 '초현령(招賢令)'에 응해 진나라를 위해 일했다.
타국 사람이었던 만큼 그가 농본(農本)과 법치를 축으로 하는 개혁정책을 펼치는 데는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본디 어떤 개혁이든 기득권층의 개인적 이익을 건드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반저항 세력이 나타나는 것은 동서고금의 상례다.
그러니 상앙이 기댈 것은 효공의 신임과 백성의 지지뿐이었으니 여기서 '이목지신(移木之信)' 일화가 등장한다.
상앙은 수도 남문에 세 길쯤 되는 나무 기둥을 세워놓고 "누구든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금 10냥을 주겠다"는 방을 붙이도록 했다. 그런데 아무도 이를 믿지 못해 수군거리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자 상금을 50냥으로 올렸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반신반의하며 나무 기둥을 옮겼더니 상앙이 상금을 주었다. 이렇게 백성의 믿음을 산 후 새 법령을 공포하니 절로 지켜졌다.
이 같은 신상(信賞)과 더불어 상앙이 추진한 개혁의 또다른 축은 '필벌(必罰)'이다. 신법 시행 후 공교롭게도 태자가 사형선고를 받은 왕족을 숨겨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법에 따르면 태자의 죄에 대한 벌은 사형이었으니 상앙은 처벌 준비를 했다. 고위층이 법을 어겨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법의 공신력 확보와 개혁 추진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법에 따르면 태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상앙은 태자를 보좌하던 장공자 건(虔)은 코를 베는 비형(鼻刑)에 처하고, 태자의 사부 공손고는 얼굴을 칼로 그어 묵을 새겨 넣는 묵형(墨刑)에 처했다.
『전국책』에서는 "이처럼 법령이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니 몇 년 뒤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줍지 않았고,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은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을 다룬 『모략가』(차이위치우 외 지음, 들녘)에 나온다. 의대생 증원 논란에 총선을 앞둔 공천으로 나라가 시끄러우니 국가 정책이나 정치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싶어 찾아봤다.
이 이야기의 뒤끝은 그리 개운하지 않다. 상앙을 발탁했던 진 효공이 죽은 뒤 앞에 이야기한 태자가 효혜왕으로 즉위했으니 상앙을 두고 보았을 리가 없다. 상앙 자신은 사지가 찢기는 죽음을 당했고, 그의 가족 친지 모두 처형당했다. 이른바 개혁의 혜택은 모두가 누리지만 정작 개혁을 주도한 이는 개혁에 치어 버린 대표적 경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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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