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으로 죽은 민비의 수대(繡帶ㆍ허리띠) 고종에 바치면서 출세가도 달려
을사늑약 서명한 을사오적에 등재…계집종에게"개돼지 보다 못한 놈"소리 들어
호시탐탐 조선을 합병하려던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타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체결했다.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대신을 협박하며 체결을 강요한 결과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불리는 그 '조약'이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했지만 이에 가담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일러 을사오적이라 해서 친일매국노의 대표로 꼽힌다.
한데 '을사오적'이라 뭉뚱그려 말하기는 해도 어지간한 이라면 이들 다섯 명의 이름을 댈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박제순, 이완용 정도나 댈까. 이 중 이근택에 대해선 역사학자 김기협이 쓴 역사에세이집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비에게 잘 보여 고종의 측근으로 자라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이근택은 민비에게 매일 신선한 생선을 바쳐 점수를 땄다고 한다. 그 덕에 민비가 환궁한 후 벼슬 한 자리를 얻었는데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은 후 어느 일본 상점에서 민비의 것으로 보이는 수대(繡帶·수를 놓은 허리띠)를 보고는 이를 사다가 고종에게 바쳐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단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업고 군사·경찰 분야의 실력자로 행세하며 친러파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친일파로 돌아서, 훗날 조선총독을 지낸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형제의를 맺고 이토 히로부미의 의자(義子)가 되어 일본 신발을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니는 등 호사를 누렸다.
『매천야록』에는 이근택과 관련해 그의 계집종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참 걸작이다.
이근택이 을사늑약을 찬성하고는 대궐에서 돌아와 아내에게 조약 이야기를 하며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라고 기꺼워했다. 그런데 이근택의 아들은, 을사조약에 반대했던 참정대신 한규설의 딸과 혼인을 했는데 그때 한 씨 집안에서 따라와 있던 계집종이 있었다. 그녀는 부엌에서 그 말을 듣더니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너는 참으로 개돼지만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그러더니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통쾌한 이야기이긴 한데 걸리는 게 있다. 당시 대한제국의 내각이라 할 의정부에 있던 8명의 대신 중 '오적'에서 이름이 빠진 한규설과 법부대신 이하영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조약에 찬성하지 않은 것만으로 과연 나라의 중신으로 제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나아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조약 반대에 목숨을 걸 수 있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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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