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1:20 (일)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⑲구로사와 감독의 원폭 인식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⑲구로사와 감독의 원폭 인식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4.03.05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은 바보 같이 원폭을 개발했고 그 피해자인 일본은 이들에게서 '사과' 받아야 한다는 논리 펼쳐
1991년작'8월의 광시곡'서 구도 설정해…칸 영화제서 "왜 핵폭탄 떨어졌는지 모르나"쓴소리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 많은 일본인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너무나 많은 고통과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다. 숱한 침탈을 당한 한국이나 중국 입장에서는 뻔뻔스러운 얘기로까지 들린다. 진주만을 폭격당한 미국도 마찬가지. 하지만 일본은 더 나간다. 원폭을 던진 미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필자는, 원폭에 대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인식이 세 단계로 변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 단계의 인식을 볼 수 있는 것은 1955년 개봉 작 <산 자의 기록(生きものの記録)>이다.

필자는, 이 영화 속 감독의 인식을 '공포' 그 자체로 규정했다. 1990년 작 <꿈>에서는 구로사와 감독의 본 두 번째 인식이 보인다. 핵 개발자에 대한 '비판'과 '원망'이다. 그리고 이 '비판'과 '원망'의 대상은 '인류 전체'와 '미국' 등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자, 이제 구로사와 감독의 1991년 작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을 보자.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구로사와 감독의 원폭에 대한 세 번째 인식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꿈>에서 분석했던 '비판'과 '원망'의 대상이 '인류 전체'인가 '미국'인가에 대한 답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 <8월의 광시곡>을 통해 우선 우리는 구로사와 감독의 인식이 ①공포에서 ②비판과 원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③비판과 원망의 대상으로부터의 사과(사죄)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비판과 원망의 대상이 '인류 전체'라기보다는 '미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할 수 있다.

영화 '8월의 광시곡'에서 미국인 조카는 원폭 피해자인 자신의 고모에게 사과한다. 구로사와는 이 ‘사과의 주체’로 미국을 대표하는 미남 배우 리처드 기어를 선택한다.
영화 '8월의 광시곡'에서 미국인 조카는 원폭 피해자인 자신의 고모에게 사과한다. 구로사와는 이 '사과의 주체'로 미국을 대표하는 미남 배우 리처드 기어를 선택한다.

그러니 결론은 이렇다. "원폭을 개발한 어리석은 또는 바보 같은 자는 미국이며 피해자인 일본은 이들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마침내 그 일을 해낸다. <8월의 광시곡>을 통해 구로사와 감독은 미국을 상징하는 잘 생긴 백인 청년의 입으로 사과를 이끌어냈으며 이로써 '피해자' 일본은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한 해 전 발표된 영화 <꿈>에서 꾸었던 구로사와 감독의 '꿈'은, 한 해가 지나, 이렇게 <8월의 광시곡>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 미국인의 사과를 이끈 구로사와= 영화는 나가사키 인근에 사는 한 할머니의 가족 이야기다. 할머니는 원폭 투하로 남편과 형제자매를 잃었다.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은 하와이에 사는 남동생. 그는 곧 죽음을 앞두고 누나를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그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러자 남동생의 아들, 즉 조카가 일본을 방문해 고모인 할머니를 만난다. 조카는 일본의 피가 흐르지만 외모는 잘 생긴 백인청년이다. 고모는 남편과 형제자매를 앗아간 원폭의 기억을 조카에게 말해 주고…. 미국인 조카는 나가사키 일대를 둘러보며 원폭 피해자들의 심정을 파악한다. 결국 미국인으로서 그는, 고모에게 사과하고 고모는 그를 용서한다.

영화는 그해 칸에 출품되고 상영됐지만 상도 받지 못했고 평도 좋지 않았다. 중일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난징 학살사건이나 정신대나 강제징용문제,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시발이 된 진주만 공습 등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일본의 피해와 미국의 사과 등의 주제만 부각시켰던 탓이다.

특히 주인공 할머니에게 사과하는 일본계 미국인 청년 클라크가 미국을 대표하는 잘 생긴 젊은 백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에도 의구심을 가질 만했다. 조카 역을 맡은 배우는 이후 당대 최고 미남으로 꼽히는 리처드 기어였다.

당연히 영화에 대한 비판도 있다. 칸 영화제에서 한 기자는 "왜 (일본이) 폭탄이 떨어진 첫 장소가 됐는지 아나"라고 외쳤다고 한다. 영화가 도쿄영화제에서 상영됐던 당시 일본 내 군국주의 비판자들 또한 그를 비판했다. 원폭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이 무시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로사와는 자신은 영화를 통해 전쟁의 원인은 정부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다. 그렇다면 전쟁, 특히 성공적인 진주만 공습에 대해 열렬하게 환호했던 국민과 언론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구로사와 감독의 군국주의 및 전쟁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영화는 여러 편이지만 군국주의와 태평양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것은 거의 없다. 이에 대해 그나마 회자되고 있는 영화는 앞서 살펴 본 그의 1990년 작 영화 <꿈>에서 나오는 네 번째 에피소드 '터널'이다.

영화 '드림'의 네 번째 에피소드 ‘터널’의 한 장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중대장이 죽어 나타난 부하 사병들에게 “너의 죽음은 ‘개죽음’”이라 일갈한다.
영화 '드림'의 네 번째 에피소드 '터널'의 한 장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중대장이 죽어 나타난 부하 사병들에게 "너의 죽음은 '개죽음'"이라 일갈한다.

영화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중대장을 그린다. 그가 한 터널을 빠져 나오다 전장에서 죽은 한 부하 병사를 만난다.

그는 중대장에서 자신이 진짜 죽은 것이냐 묻는다. 중대장이 "그렇다"고 말하자 일등병이 울부짖는다. 그가 손가락으로 멀리 자기 집 쪽을 가리키며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 믿는다"고 말한다.

중대장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자 그가 돌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지휘하던 일개 소대가 등장한다. 중대장은 흐느끼며 그들에게도 "너희는 모두 죽었다"며 "돌아가라" 명령한다.

"전쟁의 어리석음에 모든 책임을 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비난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무정견(無定見)과 잘못(過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나도 감옥생활을 했다. 그때 나는 죽는 게 더 쉽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을 보니 그때의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 … 나는 너희들의 고통을 안다. 그들은 너희를 영웅이라 하지만 너희는 개죽음이다."

이 에피소드 중 이 장면 하나로 구로사와 감독은 상당한 비판을 받게 된다. 우선 국내외 진보적 인사로부터는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전쟁의 책임'이 '전쟁의 어리석음'에 있다고 한 탓이다.

이로써 일본 천황을 비롯한 각종 전범(戰犯)의 짐을 가볍게 해 준다는 문제가 지적된다. 다른 한편 '개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일본 내 우익이 발끈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죽음을 가리켜 어찌 '개죽음'이라 할 수 있느냐는 얘기.

구로사와 감독이 갖는 모호한 전쟁관은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그의 다음 같은 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전쟁 중의 나는 군국주의에 대해 무저항적인 태도를 취했다. 유감이지만 적극적으로 저항할 용기가 없었고 적당히 영합 혹은 도피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잘난 체 하면서 전쟁 중의 일을 비판할 자격은 내게 없다."

-------------------------------------------------------------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