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운송업자, 하역작업 보다가 트럭의 짐칸 들어내 배에 내려놓는 것 착안
오늘날 1만 대의 트럭이 옮겨야 할 화물을 배 한 척이면 거뜬하게 운반해
자, 수수께끼다. 세계화의 출발점이자 '한강의 기적'의 일등공신은 무엇일까? 세계와 한국 경제사에서 각각 전환점을 만든 것은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이 두 가지 역할을 한 것은 '컨테이너'다.
적어도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가 흥미롭게 풀어간 『더 박스』(마크 레빈슨 지음, 청림출판)을 보면 그렇다.
별다른 장치가 필요없는 철제 상자는 미국의 트럭운송업자였던 말콤 맥린 이라는 사람이 처음 생각해 내었다.
그는 1937년 말 미국 뉴저지주의 저지시티 부두에서 트럭에 실린 짐을 내리는 작업을 몇 시간 동안 지켜보던 중 '크레인으로 트럭의 짐칸만 통째로 번쩍 들어다가 배에 내려놓으면 쉽고 빠를 텐데'하는 데 착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18년 뒤 구체화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남아돌던 정부 소유의 유조선을 한 척 산 다음 33피트 길이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도록 개조했다. 세계 최초의 컨테이너선이었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결과는 혁명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는 화물을 배로 수송하는 시간보다 항구에서의 하역이 더 오랜 시간이 들었다. 컨테이너에 맞춰 규격화·표준화된 물류시스템은 달랐다. 1956년 맬린의 계산으로는 운송비가 37분의 1로 줄어드니 부두 접안시설이며 하역시설, 화물을 내륙으로 옮길 철도·트럭 등 육상 물류 시스템까지 모두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무역에 새 바람을 일으킨 컨테이너가 부산항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 일이다. 미국 해운사인 맷슨라인이 부산항으로 컨테이너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렇게 물류비가 획기적으로 줄어든 덕분에 세계 경제의 변방에 있던 한국은 외국(주로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해 만든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고부가가치 상품을 유럽 등지로 수출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72년 시작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집중 육송된 조선산업이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로 발전한 것도 컨테이너선 수주에 힘입은 바 컸다.
물론 컨테이너 시스템이 순조롭게 발전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컨테이너화가 전통적인 유개화차 사업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 우려한 철도업계와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했고, 전통적으로 투쟁력이 강했던 부두노동자조합들의 파업 공세를 넘어야 했다. 1970년 베트남전쟁에서 군수품 보급에 애를 먹던 미군이 컨테이너의 이점에 눈을 돌리면서야 컨테이너 업계는 순항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1만 대의 트럭이 옮겨야 할 화물을 배 한 척이 거뜬하게 운반하고, 전 세계 항구에서 1주일에 40피트 길이 컨테이너 200만 개가 처리된다. 이런 물류의 기적이 없었다면 세계화는 아직도 멀리 있고, 한국 경제는 지금과 같은 눈부신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거라 하면 억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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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