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회장에게 '자동차와 중공업'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먼저 통보
선택권 우선 배려했다며 생색냈지만 정 회장은 1주일이나 버텨
뜻밖에 정 회장이 자동차 선택하자 이미 결론 냈던 국보위 '당황'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았던 지도자였다.
정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대조선소 설립 등 굵직한 사업들을 밀어붙였던 박 대통령이 허망하게 숨을 거뒀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박 대통령과 정 회장은 여러모로 기질이 비슷했다. 현대그룹이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 정 회장이 마음 놓고 큰 뜻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장군이 80년 5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박정희 서거로 패닉 상태에 빠진 정 회장이 새 실권자로 떠오른 전두환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현대에서는 전두환과의 대화 창구조차 없었다.
국보위는 언론 통폐합과 함께 기업 통폐합에도 손을 댔다. 국보위는 자동차 산업과 발전 산업을 통폐합하겠다며 정 회장에게 자동차와 중공업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남은 건 대우가 맡는다는 구상이었다. "그래도 정주영 회장을 배려해서 먼저 선택권을 준다"라며 생색까지 냈다. 정 회장은 그렇게 못하겠다며 일주일을 버텼다.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정 회장은 자동차를 선택했다.
국보위 내부적으로는 발전설비는 정주영이 가져가고, 대우 김우중은 현대자동차를 넘겨받는 걸로 이미 결정돼 있었다.
당연히 정주영이 중공업을 선택할 줄 알았던 국보위는 당황했다. 대우에는 중공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따라 현대양행이 대우로 넘어가고, 대우자동차는 현대로 통합하게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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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