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8:20 (금)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국가부도의 날㊥'OECD가입 일렀나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국가부도의 날㊥'OECD가입 일렀나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19.09.09 2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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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직전 10년간 88올림픽, 수출1000억달러 등 압축 성장에 자만
소득양극화 심해져 성실하게 살던 사람들 어느순간 거리로 내몰려

앞서 <국가부도의 날> 상편에서 쓴 것처럼 영화는 '사실의 뒤죽박죽'을 통해 애써 영화가 '허구'임을 알린다. 이는 자칫 있을 수도 있는 당대 인물들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진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감독이나 제작자는 늘 영화가 특정인의 명예훼손 문제와 얽힐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나 이는 예측이 어렵다. 임진왜란 당시 인물이었던 배설 장군의 후손들이 영화 <명량>을 '사자(死者) 명예훼손' 건으로 고소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국가부도의 날 사진설명 사진설명 사진설명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사진

그러나 역사에 대한 '해석' 문제라면 얘기는 조금 다르다. 역사를 그리는 이상, 비록 그것이 영화라 해도,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영화를 보는 역사가들의 관점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기 쉽다. 역사에 대한 '해석'이란 보통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뜻한다. 그렇다면 '외환위기에 대한 역사해석'은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한 해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일 게다. 외환위기는 왜 발생했는가? 소소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불일치와 왜곡은 쉬 넘어갈 수 있다 해도 이는 엄밀한 검토를 요구한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해 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영화는, IMF 외환위기에 대한 '역사해석'을, 영화 도입부에 압축적으로 담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입부는 1977년 12월 29일 있었던 '100억 달러 수출 기념 뉴스'를 필두로 20년 동안의 경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발전 전반에 대한 스케치가 담겨있다. 88올림픽 개회 선언, 삼품백화점 붕괴, 수출 1000억 달러 달성, 최진실과 김건모 등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의 새로운 대중문화, 그리고 1996년 12월 OECD 가입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빠른 터치로 보여준다.

영화가 이 도입부에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2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ㆍ사회발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한국의 빠른 경제ㆍ사회발전, 즉 압축성장에 있다는 것이다.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적지 않은 이들이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경제성장 규모에 비해 뒤떨어진 시스템을 들고 있다. 압축 성장을 이룩한 시스템이 급격한 외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과부하가 걸리고 결국 망가졌다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호하고 어중간하다. 못의 머리를 정확하게 내리쳤다고 보기 어렵다.

외환위기의 역사 해석이 궁금해질 무렵 영화는 빠르게 내러티브 안으로 몰입해 들어간다. 1997년 11월 5일 월스트리트에서 한국에서 돈을 빼라는 문자로 시작해 한국 사회가 겪는 외환위기, 그리고 이 외환위기의 상황을 맞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그린다. 그리고 20년 뒤인 2018년 또 한 차례 위기의 벼랑 끝에 선 한국의 인간 군상들의 활동으로 끝을 맺는다. 20년 전이나 20년 뒤에나 위기도 인간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뉘앙스를 주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기이하게도, 영화의 역사해석에 대한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러티브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갖게 만든다. <국가부도의 날>이 갖는 내러티브 구조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좋은 사람들', '나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로 구분해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짐 키체스(Jim Kites)나 피터 월른(Peter Wollen) 등 구조주의 영화 이론가들이 할리우드 서부영화에서 찾아낸 '동부-서부'의 구도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구도다.

'좋은 사람들(The good)'을 보자. 이들은 약자고 소수자고 정이 많고 정의롭다. 여성인 한은 통화정책팀 한시현 팀장(김혜수 분)과 그를 중심으로 강한 단결력을 보여주는 팀원이 그들이다. 그들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돈을 빌려주는 IMF는 그 반대급부로 금리인상과 구조조정, 시장개방 등을 요구할 것이며 그 결과로 기업도산, 가계도산, 실업, 빈부격차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이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됨으로써 결국 남미와 같은 나라가 될 수 있다며 반대 의견을 펼친다.

'나쁜 사람들(The bad)'은 반대다. 강하고 비정하며 부패했고 이기적이다. 조신제 재경국 차관(조우진 분)과 그 일당들, 그리고 배후 세력으로 함께 세상을 지배하려는 재벌이 그들이다. 조 차관은, 한은 통화정책팀이 반대하는 바로 그 이유로,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부격차가 확실한 사회, 그럼으로써 소수의 지배자와 대다수 피지배자가 엄격하게 나눠지는 사회, 그래서 용이한 지배가 가능하고 순종적인 피지배자가 있는 사회를 꿈꾼다. 이를 위해 뒤로는 재벌과 결탁하고 그의 힘을 통해 구제금융을 반대하는 청와대 경제수석을 바꾼다. 그는 분명 '악(惡)'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는 사실을 국민께 직접 알리며 사과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는 사실을 국민께 직접 알리며 사과했다/KBS화면 캡처

버려진 사람들(The abandoned)'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보통 사람을 대변한다. 나라 말을 믿고 열심히 일만 하다 버려지는 사람들이다. 위기가 터지자 기업도산이나 구조조정으로 대부분 실업자가 되고 이후 비정규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신세다. 영화에서는 막 커 나가려는 영세업체의 사장(허준호 분)과 경영진을 내세웠지만 일반 기업의 월급쟁이나 자영업자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좋은' 사람들은 바로 이들을 지키려고 구제금융을 받지 않으려 한다.

'이상한 사람들(The weird)'이 보여주는 행태는 영화의 주요 테마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려는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삼아 돈벌이에 나선다. 종금사 직원이었던 청년 윤정학 과장(유아인 분)과 그의 말을 믿고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환율 폭등을 예상해 달러를 사고 주가가 폭락하자 이번에는 주식을 싸게 사 돈을 번다. 폭락한 부동산도 이들에게는 그저 먹이감일 뿐이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당시 이런 사람이 진짜 있었을까? 그야말로 '허구'에 가까운 인물이 아닐까 싶다.

다시 위기가 거론되고 있다. 당신은 어떤 그룹에 속하는가? 아니, 어떤 그룹에 속하고 싶은가? 좋은? 나쁜? 버림받은? 이상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되자 가장 관심을 끌었던 캐릭터는 바로 윤정학 과장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떼돈을 번다! 많은 청년들이 영화 속 윤 과장을 꿈꾸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사회'인 탓이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찬 사회, 국가 부도의 위기를 이용해 떼돈을 벌고자 하는 청년들이 있는 사회. 이 사회는 지난 위기의 결과이자 새로운 위기의 출발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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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식민과 제국의 길』,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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