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대, 와세다대 등 명문교 졸업생도 진로 고민…전임자 죽어야 자리 난다고 꼬집기도
중동의 가자지구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닌다 해서 지구촌이 들먹거린들, 때아닌 김포의 서울 편입을 둘러싸고 여의도가 시끄러운들 시정의 장삼이사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더구나 취업에 목매고 있는 '취준생'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서울의 역사와 관련한 이야기감을 찾아보던 중 흥미로운 대목을 만났다.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까지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당대 언론보도를 통해 짚어본 『경성리포트』(최병택·예지숙 지음, 시공사)에서다. 일전에 한 대목을 소개한 적이 있지만 이번엔 취업난과 관련한 이야기다.
당시 취업난은 지금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대공황이 전 지구를 휩쓸던 시절, 변변한 산업을 일구지 못한 채 수탈의 대상이었던 식민지에서 변변한 일자리가 있었을 리가 없다. 경성전기, 식산은행 등 몇몇 대기업 외에는 대개가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채용하던 것이 관행이었으니 실력 위주의 공채(公採)는 꿈도 못 꾸던 형편. 경성제국대학이나 와세다대학 등 명문 학교 졸업생도 진로를 고민해야 할 지경이었다.
1933년 한 신문기사는 "매해 중등·전문학교 졸업생 중에서 취직하는 자는 2할"이라면서 구직을 위해 거리로 나선 취준생을 그린 삽화를 실었는데 이게 참 가관이다. 큰 깃발에 '00전문학교 졸업생'이라 출신학교를 적어 밝히고, 큰 바구니를 앞에 찼는데 거기에는 졸업장, 성적표, 상장 등을 담은 취준생의 초라한 모습이니 말이다. 이 기사는 이런 모습을 보게 될 날이 머지 않다고도 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대학졸업자도 힘이 되어줄 '빽'을 찾아 사회명사들을 찾아다녔으니 1931년 대중잡지 『별건곤』에는 〈이불 싸질머지고〉란 기막힌 기사가 실렸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씨 이야기다. "우연히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X씨가 소개장이니 이런 것도 없이 찾아와 취직을 당부하기에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어렵사리 거절을 했더니만 그날 밤 아예 이불을 짊어지고 송 씨 사택으로 쳐들어와 직업을 얻어주기까지 자기를 먹여 살리라고 우겨댔다는 것이다. 딱하게 여긴 송 씨가 내버려 두었더니 그 젊은이는 보름 동안 조르고 버티다가 겨우 퇴거했다는 이야기다.
한데 이건 약과다. "취직을 위하여 아무리 날뛰어도 별 수 없으니 가장 모던식 취직방법은 좌이대사(坐而待死)다"란 비아냥이 돌기도 했단다. 좌이대사는 구직자는 많고 일자리는 적으니 전임자가 죽기만 앉아 기다리는 게 상책이란 뜻이니 당시 취업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실제 지인에게 소개장을 부탁하며 "신문에 보니 000에 계신 분이 두 분이나 돌아가셨다는 보도가 있던데…"라고 특정 자리를 희망하는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 이런저런 구설이 있어도 요즘엔 공개채용이 나름 확립되어 있으니 요즘 취업준비생들에게 이런 옛이야기가 그나마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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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