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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역사갈피] 이란 대선 좌우했던 축구열풍
[김성희의 역사갈피] 이란 대선 좌우했던 축구열풍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3.10.10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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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제5대 대통령 선거서 '축구 팬심' 얻은 하타미 압도적인 승리 거둬
레슬링 등 야성적인 힘을 과시하는 경기 선호했던 '상대 진영'의 후보 패퇴
그 해 11월 호주와 월드컵 진출 결정전서 승리하자 여자들 히잡 벗고 파티
1987년 이란의 독재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법을 고쳐 이슬람 시대 최초로 축구 경기의 TV 중계를 허용하면서 여성들도 축구를 볼 수 있다고 선포했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1997년 이란의 제5대 대통령선거 때 일이다. 진보적 성직자이자 지식인인 모하마드 하타미와 지배층 보수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성직자 알리 악바르 나테크 누리가 맞붙었다.

국가 최고의 율법학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던 나테크 누리는 보수주의자들이 애착을 갖던 주르하네 경기를 선호했다.

주르하네는 '힘의 집'이란 뜻으로 역도나 레슬링 등 야성적인 힘을 과시하는 경기가 벌어지는 체육관을 뜻한다. 주르하네 경기는 보통 예언자 집안을 숭배하는 말로 시작하는 등 이슬람적 뿌리를 가졌다. 그러니 나테크 누리가 레슬링 챔피언들과 더불어 선거 유세를 펼친 것이 당연했다.

하타미는 달랐다. 당초 그가 권좌에 오르면 언론의 자유, 여성의 권리 신장 등 시민사회의 발전이 이뤄지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이슬람과 자유주의의 양립을 주장하던 하타미는 선거 유세에서 민주주의라든가 서구 세계에 대해 일일이 떠들지 않았다. 대신 유명 축구선수들을 몰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결과는, 국민들조차 놀랄 정도의 압승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확한 효과야 계상할 수 없지만 이란의 젊은이들은 하타미가 축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진보적 정치관에 공감했던 덕분이었다.

이 같은 이란의 '축구 혁명'에는 배경이 있다. 국외 추방됐던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여성들은 12만 관중석을 자랑하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테헤란 아자디 경기장에서 축구경기를 관람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가슴을 꼭꼭 싸매고, 긴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올린 채 남자 옷을 입고 경기장으로 몰래 들어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축구가 자유를 향한 숨구멍을 틔우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결국 1987년 이란의 독재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법을 고쳐 이슬람 시대 최초로 축구 경기의 TV 중계를 허용하면서 여성들도 축구를 볼 수 있다고 선포했다. 여전히 경기장 출입을 금하면서였다. 그러나 한 번 터진 물꼬가 그대로 있을 리가 없었다.

계기는 1997년 11월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와의 월드컵 진출 결정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승리한 날 테헤란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축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여자들은 히잡을 벗어던진 채 서구의 팝뮤직이 울려 퍼지는 파티를 즐겼다. 축구장에서 꿈틀대던 더 자유롭고 새로운 이란을 향한 열망이 분출되었던 것이다. 이후 결과는 기대만 훨씬 못한 속도로 진전이 이뤄졌지만 말이다.

막 끝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팀의 선전을 보다가 들춰본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프랭클린 포어 지음, 말글빛냄)에 실린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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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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