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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SK 70년' 형제동행 ① 창업회장 최종건
[특별기획] 'SK 70년' 형제동행 ① 창업회장 최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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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0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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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부터 한학 배워 사마천의 '사기' 즐겨 읽었고 특히 항우의 기개에 흠뻑 취해
일제 강점기 선경직물 갓 입사 했을때 한국인을 얕잡아 보는 일본직원 내동댕이 쳐
사실상 선경직물 운영하게 되자 초등학교 졸업하지 못한 여성 직원 대상 야학 운영
품질을 통해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야 기업을 잘 경영 할 수 있다는 게 평생의 철칙
임종 직전 병상 찾아온 지인에게 "(동생)종현이를 나라고 생각하고 도와 달라"유언

최종건 창업회장은 1926년 1월 30일 경기 수원시 평동 7번지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학배 공은 대성상회를 경영하는 부농으로, 일제강점기에 수세징수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해방 후 수원시의회 초대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종건 회장은 어려서 장난이 너무 심해 동네 개구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름이면 호박 넝쿨에 말뚝을 박는 일이 잦았고, 겨울이면 행주치마로 팽이채를 만들어 동네 아낙들을 곤란하게 했다.

최학배 공이 꾸짖을 때면 한학자였던 조부가 나서 "사소한 일로 자주 매를 들면 공연히 아이의 호연지기만 꺾는다."라며 말렸다.

그 덕분인지 최종건은 자유분방하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자라났고, 보스 기질이 강해 또래들이 유난히 잘 따랐다.

여섯 살부터 한학을 배운 최종건 회장은 사마천의 '사기'를 즐겨 읽었으며, 특히 항우의 기개에 흠뻑 취했다. 또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피의 역류를 느낄 만큼 감명을 받았으며,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는 막연한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남달리 체구가 크고 민첩했던 그는 수원 신풍소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전국소년축구대회에 출전해 팀을 이끌어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소학교 4학년 당시 수원 경찰서 일본인 경부(당시 관할서 과장에 해당하는 경찰 간부 직급)의 아들이 한국인 학생들을 괴롭히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맞서는 일이 있었다.

사진=SK 창립 70주년 최종건 창업회장·최종현 선대회장 어록집.
최종건 창업회장의 유년시절부터 SK창업 초기 시절까지의 모습. 사진=SK

이튿날 찾아와 추궁하는 순사들에게도 기죽지 않고 당당히 대들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항상 배짱 있게 행동했던 최종건은 이후로도 선경직물에 갓 입사했던 견습공 시절, 한국인을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는 일본인 직원을 내동댕이친 일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기계를 뜯고 조립하는 것을 좋아했던 최종건 회장은 자신의 의지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에 진학해 열정적으로 기술을 배웠다. 이는 훗날 그가 엔지니어 출신 기업가로 성장하는 데 반석이 되었다.

경성직업학교 졸업 후 선경직물에 입사한 최종건 회장은 특유의 통솔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열여덟 살의 나이에 조장으로 발탁된다. 그는 배고픈 직원들을 위해 콩을 볶아 나눠주곤 했다.

해방 후 적산으로 지정되어 방치되다시피 한 선경직물을 사실상 운영하게 되었을 때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여성 직원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했다. 그만큼 최종건은 천성이 따뜻하고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이 깊었다.

일에 몰두하느라 나이를 먹는 줄도 몰랐던 최종건 회장은 스물네 살이던 1949년 중매로 노순애 여사를 만나 결혼한다. 주변에서 '조용하고 차분한 한국의 여인상'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던 노순애 여사는 평생을 헌신하며 최종건 회장을 내조한다. 그 또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막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찾게 된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선경직물(1953년). 사진=SK 창립 70주년 최종건 창업회장·최종현 선대회장 어록집.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선경직물(1953년). 사진=SK 

1949년 결혼과 함께 사표를 내고 인견사 장사로 '내 사업'을 시작한 최종건 회장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경험을 쌓았다. 이후 1953년 한국전생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잿더미로 변한 공장에서 손수 부품을 주워 직기를 재조립하며 선경직물을 일으켜 세웠다. 이것이 결국 오늘날 SK그룹을 만들어낸 씨앗이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

공사 현장에서 땀을 가장 많이 흘리고 옷에 기름때가 가장 많이 묻어 있는 이가 바로 최종건 회장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했던 그는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으로 직원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결코 종용하는 법은 없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항상 자신이 솔선해 보이고, 힘들어하는 직원들을 보면 쉬엄쉬엄 하라고 위로했다. 그 위로가 직원들에게는 오히려 격려하는 말이 되어 더욱 힘을 내게 했다.

최종건 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전혀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성품이었다. 막걸리 파티라도 열리면 다 같은 친구요 형이요 아우요, 그래서 서로 부르는 호칭도 "야, 자", "이놈, 저놈"이었다. 그렇게 동고동락하는 그의 소탈한 인품과 통솔력은 은연중에 전 직원을 한마음으로 묶어 놓곤 했다.

이처럼 직원들 간에 형성된 포용과 일체감은 초기 선경직물의 가장 중요한 기업 가치이자 저력이었는데, 그 원천은 바로 최종건 회장의 인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끼니를 거르며 일에만 매진하는 것을 걱정하는 아내에게 최종건 회장은 평소 입버릇처럼 "잠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챙겨 먹고 일은 언제 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실제로 그는 잠자는 일, 세끼 챙겨 먹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몸은 하나뿐인데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고 바빴기 때문이다.

선경직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안내하는 최종건 창업회장(1964년 10월 15일). 사진=SK
선경직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안내하는 최종건 창업회장(1964년 10월 15일). 사진=SK

그래서 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기 위해 노력했다. 세끼 밥은 집에서 내다 먹었고, 잠은 밤에 공장 일을 돌아보다가 아무 데서나 쓰러져 눈만 붙이면 되었다. 남들과 똑같이 자고 똑같이 행동해서는 결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인재를 모아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것이야 말로 최종건의 탁월한 능력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필요한 인재가 있으면 몇 번이고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했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경영에 있어 인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장을 관리할 적임자인 김영환을 모시기 위해 세 번을 찾아갔고, 최고의 도안가 조용광을 영입하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 그의 진심은 언제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타고난 리더십과 과감한 추진력,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도전 정신으로 선경직물을 키워 나갔다. "기회가 왔을 때 망설이다가 시기를 놓쳐버리면 차라리 기회가 오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기회가 왔을 때는 칼처럼 결단을 내리고 화살처럼 추진해 나간다."라는 것이 그가 평생을 견지한 삶의 철학이었다.

1954년 제1공장과 1955년 제2공장을 빠르게 재건하고, 제5공장까지 연이어 신설하며 창업 이후 불과 5년 만인 1958년 직기 1,000대를 갖추었다. 그는 안주하는 것은 도태되는 것이며, 남보다 먼저 부가 가치가 높은 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나갈 때 기업은 발전해 나간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시설을 확장해 나갔다.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최종건 회장은 기술을 최우선하는 기업가였다. 그의 신념은 남보다 싼 것이 아니라 제일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이었다. 품질을 통해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야 기업을 잘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평생을 지켜온 철칙이었다. 창업 초기 히트 상품인 인조견 닭표 안감부터 제조원을 밝힌 것도 제품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고객과의 신뢰를 쌓기 위한 의도였다.

이후 봉황새 이불감 생산, 나일론 직물 개발, 크레퐁과 앙고라 개발, 조제트 생산, 폴리에스터 원사 '스카이론' 생산 및 수출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최고만을 고집했다.

제8회 수출의 날 대통령 표창을 수훈한 최종건 창업회장(1971년 11월). 사진=SK 창립 70주년 최종건 창업회장·최종현 선대회장 어록집.
제8회 수출의 날 대통령 표창을 수훈한 최종건 창업회장(1971년 11월). 사진=SK 

1961년 9월, 예고 없이 방문한 박정희 의장은 선경직물의 모습에 매우 흡족해하며 "수출을 해보시오!"라는 말을 건넨다. 이 말은 국내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있던 최종건 회장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평소 기업을 통해 다 함께 잘 사는 것으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그에게 외화벌이는 진정한 애국의 실천이기도 했다. 선경직물은 이듬해 4월 레이온 태피터를 홍콩에 수출해 국내 최초의 인견직물 수출기업이 되었으며, 1962년 8월 무역업을 목적으로 하는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세계 시장 진출을 시작했다.

1년에 10차례 이상 해외를 나서며 최종건 회장은 항상 부러움을 느꼈다. '왜 우리 국민은 이렇게 잘살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려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은 기업의 발전이 곧 국가의 발전이라는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이어졌다. 그는 "저 공장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국민의 것이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기업을 잘 이끌어 직원과 가족이 모두 함께 잘살고 이를 통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다." 이는 그가 평생 사업을 하며 간직한 사명감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외국에서 수입하던 직물을 국내 기술로 만들고, 국내에서 생산한 것을 외국에 수출해 외화를 획득하는 것이 기업인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종종 "국가 이미지를 대표하는 마음으로 일하라."라고 말했다. 그의 철학은 기술 개발과 수출에서도 그대로 구현되었다.

최종건 회장은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투자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개척자였다. 손해를 감수한 첫 수출, 원사 공장 건설, 위커힐호텔 인수, 석유 회사 설립에 이르기까지 주변에서 무리라고 말려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켜 나갔다. 이는 모두 할 수 있고, 해야 되고, 하면 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당선된 최종건 창업회장(1967년 7월).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당선된 최종건 창업회장(1967년 7월). 사진=SK

직물 공장으로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 회장은 항상 마음속에 원사 공장에 대한 꿈이 있었다. 이는 '섬유 산업의 수직계열화'라는 비전으로 이어졌다. 1966년 1월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수직계열화를 천명한 그는 1969년 2월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을 완공하며 마침내 일관생산체제를 갖추었다.

원사 공장을 완공하면서 선경은 명실상부한 섬유업계 대표 기업으로 부상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종건 회장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이는 그의 강력한 추진력이 빚어낸 기적에 가까운 성과였다. 최종건 회장의 마지막 꿈은 화학섬유의 원자재인 정유 공장이었다.

이후 1973년 일본 이토추 및 데이진과 합작으로 선경석유를 설립하였으나 아쉽게도 제1차 석유파동으로 꿈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탁월한 실천가였던 최종건 회장은 사업뿐만 아니라 섬유 산업 발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58년 한국직물공업조합연합회 이사를 시작으로 1963년 한국직물수출조합 부이사장을 거쳐 1964년 한국직물공업조합연합회 회장, 1967년 한국직물원사수출조합 이사장 등의 직책을 맡아 산업 육성과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수원시의회 의원(1956), 수원상공회의소 부회장(1960) 및 회장(1967), 수원체육회 회장(1969)에 당선되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했다.

최종건 회장은 1973년 11월 1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 선경그룹을 세우고 확장하겠다는 일념으로 의지를 불태운 '굵고 짧은' 삶이었다. 그의 운명이 알려지자 국가 주요 인사를 비롯한 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어 문상했다. 특히 그가 나고 자란 곳이며 평생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발전에 공헌했던 수원 시민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실제로 비탄에 잠긴 수원 시민들이 조문을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선경을 생각하는 마음과 동생에 대한 신임에 변함이 없었다. 병상을 찾아온 관계자와 지인에게 "종현이를 나라고 생각하고 도와 달라."라는 말을 거듭했다. 수직계열화라는 원대한 꿈은 동생인 최종현 선대회장으로 이어졌다.

◆최종건 회장의 경영 여정= 패기와 열정, 끈기와 집념, 그리고 무엇보다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으로 선경을 일으켜 세운 초창기 한국 경제계의 거목이었다. 아울러 어떻게 하면 기업이 시대 변화와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 진정한 경제인이었다. ㆍ특히 그는 전쟁의 폐허 속에 버려진 직기를 고쳐 희망의 불씨를 지핀 불굴의 기업인, 국내 최초로 직물 수출 시장을 개척하며 한국 경제를 주도한 진정한 선구자로서 한국 경제사에 이름을 남겼다. 선경을 작은 직물 회사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섬유 기업으로 발전시킨 최종건 회장의 삶은, 그야말로 초일류 글로벌 기업 SK의 든든한 토대이자 기반이 되었다. 그는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장남인 故 최윤원은 SK케미칼을, 둘째 최신원은 SK네트웍스를 이끌었으며, 막내 최창원은 현재 SK디스커버리 부회장으로 아버지가 남긴 유업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 [出典=SK창립70주년 최종건 창업회장ㆍ최종현 선대회장 어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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