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장례식 날 장충단서 열린 추도회에 이완용의 이름 보여
3·1운동을 두고"사리 분별 하지 못하고 나라정세 알지 못하는 경거망동" 질책
이완용이 떠올랐다. 맞다. 중학교만 다녔어도 누구나 아는 인물, 친일파의 대명사 그 사람이다. 장관 후보로 지명된 이가 예전에 어느 공개 집회에서 연설 중 "이완용이 비록 매국노였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의 발언은, 앞뒤가 잘려나갔다 해도 역사적 사실과 조금 다르다. 적어도 오래전 나온 『실록 친일파』(임종국 지음, 돌베개)에 따르면 이완용은 '준비된' 친일파였고, 뼛속 깊이 친일파였다.
그가 친일파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 데에는, 정부 대신으로 을사늑약부터 한일 병합 조약까지 참여한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실은 그의 활약(?)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한다. 이 사건 후 대한제국의 반응은 가관이다. 11월 4일 있은 이토의 장례식에 궁내대신 민병석을 정부 조문 사절로 도쿄에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 조야의 냉대에 일왕은 면회도 못한 채 쫓겨오듯이 돌아온다. 이들 말고도 황응두 등 '민간' 주도로, 이토를 살해한 조선 민족의 죄과(?)를 사죄하기 위한 13도 대표로 구성된 '사과대죄단(待罪團)'을 파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다. 이토 장례식날 서울 장충단에서는 관민 1만여 명이 참가한 이토 추도회가 열렸는데 당시 총리 이완용의 이름이 여기서 보인다. 이후 12월 12일에는 영도사에서 이완용 이하 각 대신이 참여한 이토 추도회가 잇달아 열리고 한쪽에서는 민영우 등이 중심이 되어 '동양의 영웅' 이토를 기리는 동상을 세우기 위한 모금을 시작한다. 뤼순감옥의 안중근 의사는 거들떠보는 사람 하나 없는 지경이었는데 말이다.
여기서 보이는 이완용의 행적은 '준비된 친일파'임을 보여주지만, 백 보 양보해서 그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맡았을 일이고 단지 그는 얄궂게도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라를 팔아넘긴 '공'으로 일제의 귀족이 되어 영화를 누린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게다가 그 직분에 충실했으니 말이다.
이완용은 만세 봉기가 터진 직후 매일신보·경성일보에 3차례에 걸쳐 '담화'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3·1운동을 두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나라의 정세를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이라며 "그들의 망동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일 뿐"이라 폄하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의 행복은 대일투쟁이 아니라 실력의 양성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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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