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 앞두고 궁도협회에서 양궁 떼내려하자 협회 임원진 총사퇴 강수

양궁은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됐으나 20년 벨기에 앤트워프 대회 이후 중단됐다가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부활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78년 방콕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식종목이 됐다.
한국은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김진호가 여자개인전 금메달, 여자단체 은메달을 목에 걸면서 양궁 강국으로 등장했다. 김진호는 7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면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한국은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도 남녀 단체전 금메달에 남자 개인 은메달, 여자 개인에서 은, 동메달을 추가해 양궁 강국으로 우뚝 섰다.

84년 LA 올림픽은 차기 대회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여야 하는 대회였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양정모가 정부 수립 이후 첫 금메달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소련의 아프간 침략으로 동·서가 갈려 출전 보이콧을 하는 바람에 추가 메달의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8년 만에 출전하는 LA 올림픽에서 몇 개의 금메달을 딸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양궁이야말로 LA 올림픽 금메달에 근접했고, 세계화할 수 있는 종목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양궁은 대한궁도협회에 소속돼 있었다. 궁도협회에서 양궁을 분리해야 양궁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올림픽을 1년 반 정도 앞둔 83년 1월, 김진호가 정주영 회장을 찾아왔다. 김진호는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데 궁도협회에서 예산을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지금은 선수들이 자비를 들여 연습하고 있습니다. 예산도 있어야 하고, 연습장도 있어야 합니다."
양궁을 궁도협회에서 분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정 회장도 김진호가 양궁에서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봤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양궁 분리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정 회장은 판단도 빠르고 실행도 빨랐다. 체육회에서 궁도협회에 '양궁 분리' 내용을 담은 공문을 보내라고 했다. 궁도협회는 당연히 힘들다는 반응이었고, 체육회는 '국가를 위해 궁도협회가 양보하라'라고 설득했다. 궁도협회는 "체육회가 왜 협회 일에 간섭하냐"며 강하게 반발했고, 임원진이 총사퇴하는 강수를 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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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