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 김치는 마늘과 배추를 기본 재료로 버무린'맵지않은 음식'
고추의 대명사라 할 '청양고추' 또한 태국 고추와 제주 고추를 잡종 교배해 얻은 '혼혈'

우리네 전래 음식이자, 한국인 대부분이 즐겨 찾는 김치가 세계화의 상징이라면 모두 웃을 게다. 한데 세계화를 집중 분석해온 미국 저널리스트가 쓴 『세계화, 전 지구적 통합의 역사』(나얀 찬다 지음, 모티브)에는 분명 이런 설명이 실렸다.
책은 인류 문명사가 한마디로 세계화를 향한 느리지만 착실한 진행이었다는 컨셉으로 관련 사실(史實)을 두루 짚어내는데 김치 관련 대목은 '생태 제국주의(Ecological Imperialism)'에 관한 설명에 이어 나온다.
'생태 제국주의'란 '제국'이 등장하면 영토가 확장되고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지면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생물학적 지식과 이용의 지평이 확대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란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후 담배, 토마토, 감자가 유럽으로 전래되어 식문화는 물론 사회 관습을 바꾼 것이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 지은이는 기원전 327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정복에 나섰을 때 동행했던 그리스 역사학자 아리스토볼루스가 쌀을 처음 발견한 사례를 소개한다. 아리스토볼루스는 "…물에 잠겨 있는 이상한 식물…이삭이 많이 달려 있고 대량으로 산출된다"고 소개했지만 르네상스 이후에야 유럽의 저녁식탁에 오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제국'이 뜻하지 않게 새로운 작물이나 향신료를 퍼뜨린 예도 있다며 거론한 것이 김치다. 요즘은 배추 외에도 다양한 채소, 심지어는 과일로도 김치를 담고 백김치를 비롯해 서양인 입맛에 맞는 안 매운 김치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김치는 고추와 배추의 '행복한 만남'을 가리킨다.
그런데 지은이에 따르면 '매운 김치'는 세계화의 산물이다.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 열강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갈이 남미에서 들여온 고추를 16세기에 일본으로 전했다. 그 고추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이 이를 한반도에 들여왔으며 왜군 철수 후에도 그 씨앗이 남아 한국 사람들이 즐기는 '매운 김치'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고추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김치는 마늘과 배추를 기본 재료로 만든, 맵지 않은 음식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포르투갈과 일본을 거친 남미 원산의 고추를 배추와 버무린 것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이지만 어쨌든 고추를 빼놓고는 '김치'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거칠게 말하자면 김치는 '전통식품'이긴 하지만 '고유식품'이라 하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다 하겠다. 그만큼 '세계화'는 생각보다 훨씬 일찍 우리 곁에 왔던 셈이다. 사족이지만 현재 고추의 대명사라 할 '청양고추' 또한 태국 고추와 제주 고추를 잡종 교배해 얻은 것이라니 이래저래 세계화는 오랜 뿌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새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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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