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 정치부도 확인 못한데다 현대도 '부인'해 정주영-허담 회동은 특종 불발

북한의 외교통인 허담(許錟)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정주영 회장이 만난다.
더구나 허담이 먼저 만남을 제의했다. 내용은 금강산 개발이란다. 1970년에 북한 외교상이 된 허담은 UN 회의나 비동맹 회의 등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는 등 북한 외교의 중심이었다.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과 중국 방문 때 수행하는 등 최측근이라 할 만했다. 당시는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였고,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으로 인해 남북의 관계 개선을 기대하던 때였다.
그렇지만, 북한의 최고위급 간부가 남한의 기업인을 만나자고 했다는 사실은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이전까지 남북의 정치인끼리의 만남은 있었으나 기업인과 만난 적은 없었다. 만나자는 이유도 금강산 개발이라는 구체적 내용이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천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이건 세계적인 특종이라고 생각했다. 남북 관계는 국내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이나 미국의 언론에서 다루는 한국 관련 기사의 대부분이 북한 문제이거나 남북의 긴장, 또는 완화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즉시 편집국장에게 보고했다. 내가 직접 특종 기사를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으나 나는 체육 기자였기에 눈물을 머금고 경제부에 토스했다.

그러나 이 특종은 끝내 활자화되지 못했다. 경제부에서도, 정치부에서도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다. 먼저 당사자인 현대그룹에서 펄쩍 뛰며 부인했다. 내용을 알고 있어도 부인했을 테지만 실제로 홍보실은 물론 현대의 임원 대부분이 몰랐을 것이다.
대북 창구인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인데 이 내용을 확인해줄 리 없었다. 나는 "정주영 회장이 직접 해준 이야기"라며 특종임을 강조했으나 경제부장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기사화할 순 없다고 말했다. 민감한 남북 관계였고, 금강산 개발 뉴스였다.
얼마 후에 정주영 회장이 방북해서 허담을 만났고, 현대가 앞장 서서 금강산 개발과 관광이 이뤄졌으니 나로서는 대특종을 놓친, 천추의 한이 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뒤돌아 생각하니 그때 기사가 나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가족이라고 여겨서 말한 비밀이 기사화됐다면 정 회장과 아버지 사이가 매우 껄끄러워질 뻔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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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