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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⑫만주국 설립과 총리 살해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⑫만주국 설립과 총리 살해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6.2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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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진출위해 철도 폭파 자작극 벌인 군부는 현지 군벌 장쉐량에게 책임 돌려
1932년 '만주국'을 세워 옛 청의 황제였던 선통제 (宣統帝) 푸이 (溥儀) 세워
국제연맹 개입으로 총리가 중재 안 수용하려하자 위관급 장교들이 총리 죽여

일반적으로 권력을 잡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합법적인 선거, 그리고 불법 쿠데타다. 파시스트도 마찬가지. 대표적인 파시스트 히틀러는 첫 번째, 무솔리니는 두 번째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파시스트 국가 일본은 어땠을까? 일본은 전혀 다른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다. 군부의 독자적인 행각, 그리고 내각에 대한 협박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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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말 그대로 '만주와 몽골(滿蒙)를 내 것으로 하기(領有) 위한 계획(計劃)'이란 의미다. 1931년 3월 31일. 관동군의 작전참모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와 정보참모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등 군(軍)의 영관급 핵심인물이 수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를 영유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게 핵심 내용. 특성을 보자. ➀해외에 파견된 극소수 군인이 ➁본국의 총리나 내각도 모르게 기획했으며 ➂이후 본국의 총리나 내각도 모르게 기획자가 실제로 일을 벌였고 ④결국 세계사를 바꿨다는 것이다.

약 6개월 뒤인 1931년 9월 18일. 계획의 1단계가 실행됐다. 이날 밤 10시 20분 경 관동군 일부 군인이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시) 내 류탸오후(柳条湖) 소재 남만주철도에 소형 폭탄을 장착해 폭파시켰던 것이다. 폭탄이 워낙 소형이어서 철로는 크게 훼손되지 않았고 인근 군인들도 지뢰 폭발 정도로만 여겨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남만주철도는 일본 관할이어서 누군가가 철도를 훼손시킨다면 일본군이 나설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류탸오후 사건’의 증거를 제시하는 일본군
'류탸오후 사건'의 증거를 제시하는 일본군

그날 '철도 폭파'는 추후 일본 관동군의 자작극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당시 관동군은 그 책임을 인근 장쉐량(張學良)의 동북변방군(東北邊方軍)에게 돌렸다. 이로써 일본 관동군은 장쉐량 군대 주둔지와 평톈에 대한 포격의 빌미를 잡을 수 있었다.

다음날 관동군은 펑톈시를 점령했고 길림 등 만주전역으로 전선(戰線)을 넓혔다. 이것이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의 시작이었다. 다음해인 1932년 3월 1일 이들은 '만주국'을 세워 옛 청의 황제였던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이 역시 구미 열강의 반대에 부닥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20년,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미국 주도로 설립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선두에 섰다. 당시 국제연맹은,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철수를 결의했다. 하지만 이면(裏面)의 안(案)은 달랐다. 만주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신 일본이 통제할 수 있는 지방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와 내각도 이 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군부, "말 안 들으면 또 쿠데타야"

하지만 군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기왕에 만주를 손에 넣은 이상 다시 이전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군부와 총리대신 및 내각 사이에 심각한 갈등기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젊은 군인들이 나섰다. 1932년 5월 15일 미카미 다쿠(三上卓) 등 일본 해군 소속의 위관급 장교들이 이누카이 총리를 살해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5ㆍ15사건'이다. 현직 총리가 죽고 쿠데타 성격을 띠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누카이 총리의 뒤를 이은 사람이 사이토 마코토(斎藤実)였다. 해군 장성과 해군대신을 지낸 그였다. 하지만 '해군' 출신이었다. 육군 중심의 군부와 달랐다. 하지만 그는 이누카이 총리의 죽음을 봤다. 군부와 충돌하고 싶지 않았다. 1932년 내각은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다음해인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이로써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빠져버리고 만다. 비록 사이토 총리의 진심은 아니었다 해도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는 '엎질러진 물'이 됐고 이로써 군부는 중국과의 전쟁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걸림돌이 있었다. 첫째가 사이토 총리였다. 비록 그가 만주국을 승인하고 국제연맹에서도 탈퇴하는 등 군부를 편드는 것으로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과의 전면전을 통해 중국을 점령하려는 육군 중심의 군부에 반대했다. 전선(戰線)을 넓히지 않는 현상유지를 원했던 것이다. 당연히 군부는 그를 싫어했다. 결국 군부는 그도 쫓아냈다. 주식 관련 스캔들을 터뜨리자 사이토 총리는 더 이상 총리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군부의 세계가 온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으니 사이토 총리의 후임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였다. 오카다 총리는 사이토 총리가 밀었던 사람이다. 출신이나 생각이 비슷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랬다. 오카다 총리도 전임 사이토 총리처럼 해군 출신이었고 현상유지를 원했던 것이다. 당연히 군부는 오카다 총리도 싫어했다. 그리고 오카다 총리도 제거해 버릴 요량이었다.

군부는 결국 또 일을 저질렀다. 이번에는 당시 육군 중심의 군부 세력 중 하나였던 황도파(皇道派)였다. 이들이 오카다 총리 제거에 나섰던 것이다. 1936년 2월 26일 고노 히사시(河野壽) 육군항공대 대위, 노나카 시로(野中四郎) 육군 보병 대위 등 황도파의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무려 1500명에 이르는 무장 병력을 동원했던 이들은 총리와 내각 대신들을 살해한 뒤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것이 25년 뒤 대한민국 박정희가 벤치마킹했다는, 이른바 '2ㆍ26 쿠데타'였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오카다 총리도 죽이지 못했다.

이렇게 1936년 일본 군부의 '2ㆍ26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이후 정계는, 총상 입은 환자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쿠데타 이후 외교관 출신인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육군출신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등 두 명의 총리가 내각을 이끌었지만 모두 단명하고 만다. 일본 군부가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던 탓이다. 히로타 총리는 11개월, 하야시 총리는 4개월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중일전쟁의 시발이 된 다리 ‘루거우차오’
중일전쟁의 시발이 된 다리 '루거우차오'

1937년 6월 4일 마침내 군부에 우호적인 총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황실 다음'이라는 최고 명문가 집안 출생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세습 공작의 지위로 귀족원 의원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군부, 특히 2ㆍ26 사건을 주도했던 황도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가 총리 취임 직후 쿠데타 세력을 풀어주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는, 비록 반대파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와 군부를 이어주는 강력한 끈이 됐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군부는 그를 겁박했다. "언제든 2ㆍ26 쿠데타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군부와 함께 가기로 했다. 군도 그를 택했다. 군부의 뜻에 반하지 않았던 탓이다.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고노에 총리는 이전 총리와는 달리 '장수(長壽)'했다. 1937년 6월 4일부터 1939년 1월 5일까지, 1940년 7월 22일부터 1941년 7월 18일까지, 그리고 다시 이어서 1941년 7월 18일부터 1941년 10월 18일까지 모두 세 차례 총리를 지내며 내각을 이끌었다.

그가 첫 번째 총리에 취임한 지 한 달 뒤. 마침내 그날이 왔다. 1937년 7월 7일. 당시 일본군 연대장이었던 대좌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중국 베이징 융딩강(永定河) 위 루거우차오(蘆溝橋) 다리에서 한 총성과 함께 일본군 병사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러자 그는 이를 중국 국민혁명군의 행위로 단정 짓고 공격을 명령한다. 추후 이 병사는 되돌아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이후 1945년 9월 2일까지 무려 8년 가까운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펼쳐진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고 4일이 지난 7월 11일 고노에 총리는 한편으로는 중국과 정전협상에 들어갔으나 다른 한편 육군을 증파에 전쟁을 키우려 했다. 그리고 사건 발발 20일도 안 된 7월 25일 일본군은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을 공격했고 닷새만인 7월 30일 두 도시를 점령했다. 한편 사건 발발 열흘만인 7월 17일 중화민국 행정원장 겸 군사위원장 장제스는 "일제에게 전 민족의 운명을 걸고 저항할 것"을 선포했다. 중국으로서는 그야말로 국운을 건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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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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