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일원으로 대우 받던 '쌀집 할머니'의 장남 이 말을 듣고 기자 아들에게 알려

정주영 회장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 가족들을 챙겨 줬다. 핏줄을 나눈 사이가 아닌데도 평생 가족처럼 대했다.
정 회장은 매년 1월 1일 청운동 자택에 동생들과 '몽夢'자 돌림 자제들을 불러 덕담을 나눴다. 여기에 유일한 외부인이 끼어있었다. 바로 쌀집 아주머니 아들인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정 회장의 초대를 받아 1월 1일 모임에 참석했다. 나도 아버지를 모시고 몇 차례 참석했는데 중앙일보에 입사하고 나서는 참석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할머니를 소개할 때 "내가 배고플 때 밥을 먹여준 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고작 3년간 인연을 맺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후손들까지 챙기는 분은 처음 봤다.
정 회장의 배려 덕에 우리 가족 중 여러 명이 현대와 인연을 맺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에 이어 1950년 현대건설을 창업한 정 회장은 현대건설 초창기에 아버지에게 경리부장을 맡겼다. 정 회장은 양정고보와 일본 중앙대를 졸업한 아버지에게 '가족'끼리 힘을 합쳐보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외삼촌은 현대건설의 태국 도로 공사 현장에서 일했고, 동생은 현대 정공에서 일했다.
나도 현대그룹에 입사할 기회가 두 차례 있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을 맺지 못하고 기자의 길을 걸었다. 대신 영양사인 나의 내자內子가 현대시멘트에 다녔다. 그러니 때로는 현대가 마치 친족 회사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정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아버지, 어머니, 내자 등이 모두 핵심 선거운동원으로 뛰기도 했다.
1989년 새해 첫날, 여느 때처럼 현대 가족들과 함께 하남에 있는 선영에 다녀온 아버지가 엄청나게 중요한 뉴스를 전했다.
정 회장이 가족들과 덕담 중에 "북한의 허담이 나를 만나자고 비공식 제의를 해왔어. 금강산 개발 문제를 다루자는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직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극비의 얘기를 가족들 앞에서 부담 없이 꺼낸 것이다. 아버지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며 들려줬다. 그러나 평생 기자인 나는 본능적으로 '특종'의 냄새를 맡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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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