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10:20 (월)
[김성희의 역사갈피] 나치 사슬 피한 '볼펜'
[김성희의 역사갈피] 나치 사슬 피한 '볼펜'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3.06.1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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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인 라슬로 비로, 작은 볼 베어링이 든 펜 만들어 특허 냈다가 아르헨티나로 이주
높은 고도에서도 잘 써져 초기엔 영국 공군도 주고객…英에선 '바이로'가 볼펜 동의어
1945년 대중화 … 사업권 이어 받은 프랑스인 마르셀 비크가 '빅' 볼펜으로 큰 돈 벌어
'빅' 볼펜은 2005년 현재 총 1천억 개가 세계 곳곳에서 팔렸을 정도로 볼펜 시장의 선두주자로 등극했다. 사진=BIC/이코노텔링그래픽팀.

요즘은 이메일을 비롯해 컴퓨터로 글을 쓰고, 출력하는 일이 많으니 예전 같지는 않지만, 필기도구의 왕은 아무래도 볼펜이다.

휴대성도 뛰어나고, 만년필이나 연필에 비해 쓰임새도 넓으니 그런 대접을 받는 듯하다.

한데 우리가 무심코 보아 넘기는 볼펜은 누가 발명했을까. '잉크병이 달린 펜'은 이미 1804년 영국에서 프레데릭 폴슈란 이가 특허를 낸 터였다.

만년필의 원조라 할 폴슈의 '파운틴 펜(fountain pen)'은 글을 쓸 때마다 펜촉으로 잉크를 찍어 써야 하는 기존 펜의 불편함을 없앴지만 때때로 잉크가 흘러내리는 낭패를 겪어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이에만 쓸 수 있었다.

1888년 10월 존 라우드라는 영국의 무두장이가 만년필의 이런 단점을 풀어줄 필기구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 가죽을 가공하는 일을 하던 존 라우드라는 무두장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죽에 문자를 쓰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다. 펜 끝에 회전하는 작은 볼을 넣어 펜에 달린 잉크통에서 잉크가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장치로 볼펜의 원조라 할 만한 장치였다.

하지만 라우드의 발명은 상업화되지 못하고 잊혔다. 시대를 앞선 탓이 컸다. 당시에는 손에 간편하게 쥘 수 있는 필기도구의 펜 끝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고 단단한 '볼'을 만들 만한 기술도 없었고, 그런 장치에 대한 시장의 수요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펜 대중화의 영예를 누린 사람은 헝가리인 라슬로 비로다. 의사 교육을 받았지만 졸업을 못해 최면술사, 자동차 경주 선수로도 활약하던 그는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비로는 화학자인 동생 죄르지와 함께 신문 인쇄에 쓰이는 잉크를 연구하다가 회전할 때 잉크가 배어나오는 작은 볼베어링이 든 펜을 만들어냈다. 1938년 헝가리에서 특허를 받았는데 1940년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뒤 1943년 그곳에서 다시 특허를 받았다. 비로가 만든 펜은 높은 고도에서도 잘 써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영국 공군도 주요 고객이 되었던 덕분에 영국에서는 '바이로'가 볼펜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래도 볼펜의 대중화는 늦어졌으니 1945년에서야 일반인에게 처음 판매되었다.

시장의 반응이 호의적이자 비로는 프랑스인 마르셀 비크(Marcel Bich)에게 사업권을 주었다. '빅(Bic)'이란 회사를 차린 비크는 비로의 설계를 변형하여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빅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저렴한 볼펜이 대중화되었으니 마르셀 비크야 말로 '볼펜의 아버지'라 할 만하다. 어쨌든 '빅' 볼펜은 2005년 현재 총 1천억 개가 세계 곳곳에서 팔렸을 정도로 볼펜 시장의 선두주자로 등극했다.

지식의 오류를 짚어주는 『지식의 반전』(존 로이드 외 지음, 해나무)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는 비로의 생일을 '발명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니 그는 비록 막대한 부는 놓쳤지만 영예는 누린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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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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