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5:50 (일)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⑪軍폭주에 총리는'허수아비'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⑪軍폭주에 총리는'허수아비'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6.08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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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출신 다나카 기이치 (田中義一) 총리에 무사든 군인이든 함부로 못해
그런 그에게도 군부 손댈 힘 없어…보고없이 만주군벌 장쭤린의 열차폭파 자행
1931년 영관급 장교 주도'쿠데타 모의'가 발각 되지만 단 한명도 처벌 받지 않아

폭주기관차. 대공황을 겪고 있던 1930~31년 일본 군부(郡府)에 붙여질 수 있는 적합한 별칭일 것이다. 하마구치에 이어 와카쓰키 내각에 이르기까지 군은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행동했다. 중국의 군벌의 수장 장꿔린을 살해했고 이에 분노한 하마구치 내각을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폭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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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 군부는 답답했다. 내부적으로는 권력 장악에 실패했다. 민주화 세력과 국제협력 세력 등의 훼방 때문이었다. 외부적으로는 구미 열강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느새 '세계 5대 열강'에 올라선 일본이었다.

구미 열강의 견제가 심해졌다.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뭔가 이뤄 놓으면 이를 무산시키기 일쑤였다.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유럽의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등 군부독재 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의 진행 경로를 알려면 누구보다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총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27년 쇼와금융공황으로 물러난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총리의 후임이었던 그는 철저한 사무라이였다. 조슈한(長州藩)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나이 겨우 열 셋에 메이지정부를 상대로 한 사족(士族)반란에 참여했을 정도다. 이후 그는 일본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했으며 육군대장에 육군대신(육군부 장관)까지 지냈다. 무사든 군인이든 그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황고군사건
황고군사건

총리가 된 뒤에도 그는 산적한 난제들을 무난히 해결하는 것으로 보였다.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은 은행들의 일시적인 영업정지로 해결했고, 1928년 보통선거법에 따른 첫 번째 선거도 큰 문제없이 치러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군부만큼은 쉽지 않았다. 도무지 관리가 되지 않았다. 총리의 말을 안 듣는 것은 약과였다. 아예 총리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을 보자. 이는 1928년 6월 4일,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시) 내 황고둔(皇姑屯)에서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탄 열차를 폭파하고 그를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호시탐탐 만주 침탈을 노리던 관동군은 만주 군벌 수장 장쭤린을 포섭하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그를 제거하고 만주를 직접 지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황고둔사건은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첫 단추였다.

■ 총리도 몰랐던 '황고둔사건'

문제는 이 사건이 관동군의 단독 행위였다는 점이다. 관동군은 본국의 총리나 내각의 지시를 받기는커녕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다나카 총리는 장쭤린의 활용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를 이용해 만주에서의 국익을 챙길 수 있다고 봤다. 그러니 관동군의 결정은, 총리가 보기에, 국익에 반(反)하는 행태였다. 노발대발한 총리는 사건 관련자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군부가 그를 거부했고 총리는 뒤늦게 군부의 편에 서려 했으나 결국 사퇴하고 만다.

황고둔사건과 다나카 총리의 사퇴는 군부가 자신의 힘을 과시한 좋은 사례다. 이후 군부는 일사천리로 나아갈 듯 보였다. 하지만 아직 아니었다. 몇몇 걸림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나카 총리의 후임이었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가 그중 하나였다. 그는 관료 출신이었다. 군(軍)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거기에 국제파였다. 열강들과 좋은 사이로 지내는 것이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봤다.

이런 관점에서 하마구치 총리가 국제정치 및 경제와 관련해 '대세'를 따랐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글 여러 곳에서 얘기했듯 그는 1929년 '금본위제'에 가입하기 위해 금해금(金解禁)을 단행했다. 이유? 간단했다. 그것이 세계적 추세였던 것이다. 구미 열강들은 이미 금본위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미 '세계 5대 강국'이 된 일본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금본위제 가입은 곧 강력한 긴축정책을 의미했다. 당연히 국방비 예산도 축소됐다. 그에 대한 군부의 분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본 군부가 하마구치 총리를 미워한 이유는 또 있다. 그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도 구미 열강의 희망을 따르려 했다는 점이다.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했고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세 번째 군축회의였던 1930년의 런던회의에서도 군축에 동의했던 것이다. 런던회의 일본 대표로도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전 총리를 파견했다. 이는 이전의 군축회의에 해군대신을 보내던 관행을 깬 것으로 다시 한 번 군부의 분노를 산다.

하지만 하마구치 총리의 말로(末路)는 여러 가지로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제가 참담했다. 금본위제 도입의 시기가 좋지 않았던 탓이다. 미국 대공황과 중첩되면서 일본 내 심각한 불황을 가져왔다. 게다가 경기침체 중 펼친 긴축정책으로 일본경제는 더욱 엉망이 되고 만다. 1931년 뒤늦게 다시 금 수출입을 금지하며 금본위제에서 이탈했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경제는 엉망진창이 된 뒤였다. 역사는 이를 1930~31년의 '쇼와공황'라 부른다.

정치적으로도 안 좋았다. 특히 워싱턴회의에 관료출신 정치인을 보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됐다. 당시 군 통수권자는 천황이었으며 군은 천황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군축회의에 하마구치 총리가 관료출신 정치인을 보낸 것은 천황의 통수권을 침해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신으로 숭배되던 천황의 입지를 감안한다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1930년 11월 결국 한 우익 청년이 이를 문제 삼아 하마구치 총리를 저격한다.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마구치 총리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던 1931년 3월, 이번에는 군의 영관급 장교들 주도의 쿠데타 모의가 발각된다. 쿠데타 세력은 1만 명의 군중을 동원해 사회혼란을 부추긴 뒤 영관급 장교들이 의회를 장악, 하마구치 내각을 몰아낸다는 계획이었다.

차기 총리는 자신들이 존경하는 육군대신을 모신다는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실패. 내부 갈등으로 계획은 실행조차 되지 못한다.

놀라운 것은 이 쿠데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됐음에도 군부는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쿠데타 모의 세력 중 처벌받은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분명했다.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 했으며 그로써 중국에 대한 이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가 임시 총리를 맡아 운영되던 내각은 이 정도로 무기력했다.

이 사건 직후 하마구치 총리는 정식으로 사임한다. 피격의 후유증이 심했던 데다가 격변의 정치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그리고 몇 달을 더 고생하다 결국 사망하고 만다. 여기까지는 일견 군부의 승리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1931년 4월 하마구치의 후임으로 취임한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가 이를 의미했다. 그 역시, 하마구치 총리처럼, 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료 출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그가 군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부에 대한 그의 통제권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군은 이제 총리와 내각을 허수아비로 볼 정도에 이른다. 그리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처럼 폭주를 시작했다. 총리도 내각도 그의 앞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대로 밀어붙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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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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