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23:05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⑩탈출구 찾는 군부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⑩탈출구 찾는 군부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23.06.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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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60년 만에 '세계 5대 강국' 부상했지만 구미 열강들의 견제는 물론 내치에서도 잇단 쓴잔
무솔리니의 집권에 이어 히틀러 나치당의 부상은 일본 군부를 자극해 2차 세계대전 주축으로

일본 근대사는 전쟁과 침탈의 역사다. 19세기 중반 양이(洋夷)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치르며 대만과 조선이라는 식민지를 얻었다. 주도자 군부(軍府)는 총리도 내각도 손쓰기 어려운 막강한 힘을 갖게 됐다. 하지만 1910~20년대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과 경제 불황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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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910~20년대 일본을 봤다. 경제를 먼저 봤고 그 다음 정치를 봤다.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현대 학문은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어서 상호연계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경제학에서는 경제만, 정치학에서는 정치만, 역사학에서는 역사만 보려는 시각이 강하다. 당연히 독자의 시각도 분리된다. 정치와 경제와 역사가 하나로 엮이는 시각은 찾기 어렵다.

1920년대 일본경제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1990년대보다 더 혹독했다. 10년에 한번쯤 겪을만한 공황, 즉 패닉의 연속이었다. 1920년 전후(戰後)공황, 1923년 진재(震災)공황, 1927년 쇼와금융공황, 그리고 대공황에 따른 쇼와공황까지. 경제의 어려움은 군부라도 피해가지 못했다. 군 자체의 예산 삭감 등의 문제와 함께 각각의 병사들은 고향의 가족들 생계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1905년 체결된 포츠머스조약. 미국의 견제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배상금을 받지 못한다.
1905년 체결된 포츠머스조약. 미국의 견제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배상금을 받지 못한다.

정치적으로는 더 큰 곤란을 겪었다. 1911년에서 1925년까지인 '다이쇼 데모크라시' 기간 동안 군부의 의도는 속속 깨지고 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을 노렸지만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의 거부로 실패했다.

군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이온지 총리와 내각을 무너뜨리는 강수를 뒀다. 그러자 이번에는 민심과 중의원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군인 출신 총리였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역시 '쌀소동'에 따른 민중과의 충돌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일본 내부 갈등에 따른 군부의 좌절은 1920년 내내 계속됐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군부를 괴롭힌 것은 또 있었다. 구미 열강들이었다. 개국 60년 만에 '세계 5대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이었다. 군부는 내심 아시아 나아가 세계 패권 국가로의 도약을 꿈꿨다. 그러나 구미 열강들은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열심히 싸워 뭔가 얻었다 치면 그들이 나타나 무위로 돌리기 일쑤였다.

■ 세계제국 꿈꾸던 일본 군부의 좌절= 열강의 간섭에 의한 일본, 특히 군부의 좌절은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됐다. 하루빨리 세계로 뻗어나가 더 많은 식민지를 얻고 더 강력한 제국이 되고 싶었던 일본 군부로서는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30년 동안 일본이 열강에 의해 좌절당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9세기 사건으로, 1895년 있었던 '삼국간섭(三國干涉)'을 보자.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과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체결, 타이완(臺灣)과 펑후(澎湖) 및 랴오둥(遼東)반도를 할양받기로 했다. 하지만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던 러시아가 이를 막아섰다. 유럽의 강국 프랑스와 독일까지 끌어들여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구미열강에 의한 첫 번째 좌절을 겪는다.

러일전쟁에서도 뜻을 굽혀야 했다. 1904년 2월 전쟁이 터진 뒤 1년 동안의 육전과 해전 모두에서 일본은 압도적인 우위를 달성하고 있었다. 구미 열강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일본이 유럽의 강국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한다면 자칫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견제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그러자 미국이 견제를 시작했다. 1905년 1월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중재의 뜻을 밝혔던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 의사는 그해 9월 결실을 맺었다. 러시아와 일본 간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이 체결됐던 것이다. 이 조약 결과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는 등 적지 않은 것을 얻었지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얻지 못했다. 바로 배상금이었다. 엄청난 국민 세금을 쏟아 부은 전쟁에서 '현찰'은 얻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써 제1차 가쓰라 다로(桂太郎) 내각은 군부는 물론 언론과 국민의 질타를 면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일본은 다시 한 번 좌절을 겪는다. 1914년 7월 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한 달 뒤인 8월 영국과의 동맹을 이유로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물론 전장의 무대는 아시아였다. 일본은 즉각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산둥성(山東省)을 빼앗는다. 그리고 속내를 드러낸다. 다음해인 1915년 1월 중국 북양정부의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상대로 놀랄만한 청구서를 내밀었던 것이다.

➀중국 정부는 독일이 산둥성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권익을 일본 정부가 승계함을 인정할 것, ➁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할 것 등 모든 내용이 중국에게는 끔찍한 것이었다. 요구사항은 세부적으로 매우 구체적이어서 무려 21개나 된다. 이것이 역사에 '21개조 요구조항'으로 기록된 이유다. 내용을 보면 중국은 거의 일본의 식민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위안스카이는 대부분을 받아들인다. 황제가 되고 싶었던 그에게는 일본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또 상황이 바뀌고 만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경계하던 미국이 또 다시 일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미국은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를 개최하며 일본을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미국이었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조약 체결 당사자로 황제가 된 위안스카이는 두 달 만에 이를 철회했고 석 달 뒤에는 사망하고 만다. 일본으로서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일본은 산둥성의 이권을 독일에 반납하기로 하는 등 21개조 요구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만다.

1921년 워싱턴회의 현장. 이 회의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요구사항인 ‘21개조’는 대부분 무효화됐다.
1921년 워싱턴회의 현장. 이 회의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요구사항인 '21개조'는 대부분 무효화됐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견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구미 열강이 모두 중국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소국 일본이 어느 틈에 '세계 5대 열강'으로 자리를 잡으며 동아시아에서 구미 열강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든 유럽이든 동아시아에 치중하기 어려웠다. 세계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데다가 동아시아 바다는 너무 멀었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손발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동아시아에서의 군비축소는 1921년 개최됐던 워싱턴회의가 시작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 세계 주요 강국 9개국이 회의 결과 맺은 협정에서 주력함의 비율을 결정했다. 미국 5, 영국 5, 일본 3, 프랑스와 이탈리아 각 1.78로 하고 10년 동안 전함의 건조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뻔했다. 일본의 해군력이 미국과 영국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30년 런던회의에서는 영국, 미국, 일본 간 보조함 비율까지 10:10:7로 규제, 구미는 일본의 힘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는 듯 보였다.

1910~20년대 일본 군부는 이처럼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이어 독일에서도 히틀러가 등장했던 것이다. 1922년 쿠데타로 40도 안 된 나이에 일찌감치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였다. 그는 이후 군부독재를 강화했고 1928년에는 이미 군부독재의 완성 단계에 이른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당도, 다소 늦었지만, 무솔리니를 따라갔다. 1930년 총선에서 대공황의 참극에 힘입어 18.3%의 지지율을 보이며 급성장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군부에 기초한 극우세력이었다. 국가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등 성향도 같았다. 추후 이 같은 정권의 성격에는 '파시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불가피하게 전쟁과 침탈에 편향성을 갖고 있던 이들은 일본의 군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지향점이 비슷했고 친화력이 있었다. 결국 이들은 하나가 돼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으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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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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