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10:35 (일)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⑦다이쇼 데모크라시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⑦다이쇼 데모크라시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4.19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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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大正) 는 1912년~1926년 재위한 천황 요시히토(嘉仁)의 연호
메이지 유신후 군과 지역파벌 중심 정치서 의회주의 씨앗 뿌렸던 시기
중의원 오자키 의원,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카스라 총리 끌어내려

20세기 전반의 일본은 군국주의와 파시즘으로 대변된다. 이들은 일본이 급속하게 '세계 5대 열강'이 된 데에도 한 몫을 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다. 10여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 동안 일본에도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역사는 이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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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1920년대 일본경제를 '경제'라는 외길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누차 강조해 왔듯 경제는 혼자 외롭게 가는 게 아니다.

정치란 '짝'이 있다. 정치와 경제는 늘 '짝'을 이뤄 움직인다. 때로는 당기고 때로는 민다. 오죽하면 '정치경제학'이란 말이 나왔겠는가. 둘 중 하나만 알면 둘 다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1920년대 정치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1920년대 경제를, 그리고 1930년대 정치ㆍ경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는 용어를 들여다보자. '다이쇼'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재위했던 일본 천황 요시히토(嘉仁)의 재위기에 사용됐던 연호(年號)다. '다이쇼 1년'은 당연히 1912년을 가리킨다. 그러니 '다이쇼 데모크라시'란 용어를 통해 그 의미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시히토의 재위 기간, 즉 1912~26년을 전후해 일본에서는 민주주의가 꽤 발전했나 보다 하는 것이다.

■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 신해혁명

맞다. 다양한 설(說)이 있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요시히토의 즉위 1년 전인 1911년부터 사망 1년 전인 1925년까지의 14년 동안을 얘기하려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일본은 정치적으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추구한 시절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시기 구축된 민주주의의 정치구조를 올바로 이끌어 갔다면, 어쩌면, 일본은 군국주가 아닌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본 근대화의 길도 달라졌을 것이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뒤의 상하이 시내.
신해혁명이 발발한 뒤의 상하이 시내.

일본의 근대화는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그 시작이다. 이 해 에도(江戶)의 바쿠후를 물리치고 천황 중심의 메이지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정권 창출을 위한 쿠데타가 성공했던 것이다.

일본 역사에서 워낙 중요한 사건이라 이 유신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음 특성을 부인할 학자는 없을 것이다. 즉 메이지유신은 ➀사쓰마(薩摩)ㆍ조슈(長州)ㆍ도사(土佐) 등 세 개 한(藩)의 ➁젊은 그리고 ➂하급무사들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메이지유신의 '3걸(傑)' 등 주역들의 면면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사쓰마한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조슈한 출신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도사한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은 당시 모두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자 30대의 열혈 청년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근대화에 대한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지금도 일본 역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당연히 이들 대부분은 이후 지연(地緣)으로 똘똘 뭉쳤다. 그리고 나라의 발전을 위하는 길로 침략과 전쟁을 선택하려 했다. 워낙 지역색이 강해 당시 행정구역이었던 '한(藩)'의 이름을 따 '한바츠(藩閥)'로 불리기까지 했다. '한바츠'는 흔히 '재벌'로 불리는 '자이바츠(財閥)'나 '군벌'로 불리는 '군바츠(軍閥)' 등과 비슷한 성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바츠. 이들은 일본의 군부, 극우, 침략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이 같은 '한바츠'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적(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확실히 이 '한바츠'를 이겨내고, 비록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일본 민주 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했던 시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바츠를 이겨냈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들의 지연을 극복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확실히 전쟁과 침략을 위한 이들의 각종 시도를, 비록 일부지만, 막았다는 의미도 갖는다.

그 시작은 1911년이었다. 이 해에 중국은 구(舊)왕정인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 쑨원(孫文)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대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정치 혁명은 흔히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혼란을 가져온다. 1911년의 신해혁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군부는 이를 침략의 호기로 봤다. 그리고 실천을 위한 전략을 짰다. 당신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上原勇作)가 선두에 섰다. 식민지 조선에 사단병력 2개를 늘리자고 주장했던 것. 러일전쟁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군부는 이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가 이끌었던 내각은 이를 거부했다. 러일전쟁 이후 수습되지 못했던 재정난과 민심이반, 그리고 서구 열강과의 관계 악화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군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에 반대하는 세력은 그것이 총리라 해도 그냥 둘 수 없었다. 우에하라 대신은 충격적인 묘수를 썼다. 사표를 내되, 총리가 아닌 천황에게 직접 냈던 것이다. 총리를 상급자로 인정하지 않는, 그야말로 하극상이었다. 게다가 육군의 실세는 후임도 추천하지 않았다. 당시 총리는, 형식상 내각의 총 책임자였지만 군에 관한 한 실세와 상의 없이 자의적인 인사는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사이온지 내각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력감과 모멸감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내각 총사퇴뿐이었다. 이로써 군부는, 일단 승리를 거뒀다. 새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郎)도 조슈 출신이었으며 군인이었다. 당연히 친(親)군부 인사로 분류되던 인물이었다. 이로써 군부는 총리와 내각 전체를 손아귀에 넣은 것으로 보였다. 이제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 러일전쟁 … 배상금 없는 승리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민심이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이미 민중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서양의 강국 러시아와 맞붙어 이뤄낸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일본 국민의 고혈을 뽑아 만든 엄청난 세금을 쏟아 부은 전쟁이었다. 일시적인 승전보(勝戰報)는 국민의 실질적인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배상금'이 없었던 것이다.

러일전쟁 중 불타오르는 발탁함대.
러일전쟁 중 불타오르는 발탁함대.

이는 1894년 벌였던 청일전쟁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음해 4월 양국 간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통해 얻어낸 것은 청의 조선에 대한 포기, 요동반도 등 영토 할양 등 엄청난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은 청으로부터 2억 냥의 배상금을 받기로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4년 치 세수에 해당될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얻은 실질적인 소득은 없었다. 미국 뉴 햄프셔의 포츠머스 회담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승리를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중국에서 얻은 러시아의 이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러시아는 돈이 없었다. 일본에 각종 이권을 넘겨줄 수는 있어도 배상금은 줄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일본에게 러시아와의 전쟁은 '현찰' 없이 끝난 전쟁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일본 국민은 전쟁, 그리고 가쓰라 내각에 냉담했다. 엄청난 돈을 쓰고도 돈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중의원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가 그 민심을 대변했다. 1913년 2월 5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가쓰라와 그의 동료들은 천황의 바짓가랑이 뒤에 숨어 있는 겁쟁이들"이라 비난하며 가쓰라 총리의 탄핵과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군부의 강력한 힘이 내각을 무력화시켰고 권력을 지역 중심으로 재편한다고 비난했다. 이는 당연히 헌법과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총리 가쓰라는 말하기 힘든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당연히 칼을 꺼냈다. 중의원을 해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중의원의 반발이 컸다. 중의원 해산 시 국민 폭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양측의 힘 싸움은 오자키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1913년 2월 20일 마침내 가쓰라 총리는 총리 자리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총리에 오른 지 불과 두 달 만의 일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에서 1913년 가쓰라 내각 사퇴까지 2년 남짓한 기간은 이처럼 일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기간이었다. 군부의 승리로 권력을 차지했던 가쓰라 내각은 중의원 오자카에 의해 퇴진하고 만다. 이 승리는 이후 '제1차 호헌운동'으로 이름 붙여졌고 이때부터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본격 시작됐음을 알린다. 오자카 의원은 지금껏 일본에서 '일본 의회정치의 아버지'라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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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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