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3:25 (금)
■'8 .3 사채동결'과 성장통㊤빚더미 기업의SOS
■'8 .3 사채동결'과 성장통㊤빚더미 기업의SOS
  • 양재찬 이코노텔링 편집고문 (언론학 박사 · 경제저널리즘)
  • jouryang@hanmail.net
  • 승인 2019.08.0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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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資로 공장을 지어 운영하던 기업들 70년대 세계경기의 불황으로 휘청
수출촉진 위해 원화가치 낮추자 원리금상황 가중… 급전은 사채에 의존
김용완 전경련 회장 "고리 사채에대한 정부의 비상한 결단 해달라" 애원

 47년전 오늘은 정부가 기업이 진 빚을 동결해준 날이다. 이른바 '8.3 사채동결' 긴급명령이다.  이 조치로 숨 넘어가던 기업들은 가까스로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극약처방이었지만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부작용이 없을리 없었다. 기업인들이 자신의 기업에 사채놀이를 한 것이 드러나 '모럴해저드'란 비판의 표적이 됐고 정부가 기업을 살려주면서 '정경유착'의 고리가 그 때 형성됐다. '가계부채 1500조원'시대에 당시의 상황을 돌아 보는 기획을 세 차례 나눠 싣는다. 금융의 신뢰와 질서가 무너지면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를 '8.3조치' 는 증언하고 있다.<편집자주> 

8.3사체동결 조치는 하루전인 8월2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 다음날 당시 석간신문이던 동아일보가 이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1면지면이다
8.3 사채동결 조치는 하루전인 8월2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 다음날 당시 석간신문이던 동아일보가 이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1면지면이다

아무리 지본주의는 빚을 먹고 산다지만, 과도한 빚은 결국 탈이 난다. 제때 이자와 원금을 갚지 못하면 부도를 내거나 파산하고, 신용을 잃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 모두 마찬가지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한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길지 않은 우리나라 자본주의 경제 역사에 기업의 부채를 국가가 나서 구제해준 일이 있었다. 명색이 시장경제를 한다는 나라에서 기업 부채를 동결 또는 탕감해준다는 것은 생각조차하기 어려운 극약처방이었지만,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1972년 8월 3일 단행됐다. 이른바 ‘8․3 긴급조치’, 헌법 73조에 의한 대통령의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발동이었다.

한국 경제의 시작은 사실 1960년대 들어서이다. 해방, 6․25 전쟁, 정전협정에 이르는 동안 한국 경제는 높은 물가상승률과 전쟁에 따른 재산 손실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50~52년 사이 서울의 도매물가는 14배나 급등했고, 경제는 연평균 4%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전후 1957년까지 한국 경제는 사실상 대외원조로 지탱했다. 소득수준이 낮은데다 높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국내 저축에 따른 자본 형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공업화도 제분, 제당, 면직의 ‘3백(白)산업’ 중심의 구호원조 물자 가공 수준이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았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했고,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다. 화학과 철강, 기계 등 중화학공업 육성에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기술과 인력도 부족했지만, 특히 자금이 문제였다. 국내자본이 형성돼 있지 않으니 외국자본을 들여와야 할 텐데 전쟁을 겪은 가난한 한국에 어느 나라가 선뜻 돈을 빌려주겠는가. 해방 이후 막대한 원조를 제공했던 미국도 정작 차관에는 인색했다. 일본과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1962년 서독으로부터 들여온 4000만 달러가 제1호 상업차관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기업들의 상업차관 도입에 지급보증을 하고 나섰다. 개별기업 신용으로는 사업자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정부가 빚보증을 서준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아래 ‘불도저’라는 별명의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차관 도입을 독려했다.

취지가 좋아도 과하면 탈이 나는 법, 무리한 차관 도입은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외국자본이 들어와 공장이 지어지고 수출이 증가하며 경제가 발전했지만, 세계 경기가 불황을 겪으면서 차관기업들이 무더기로 부실 사태를 빚었다. 환율과 금리 부담 속에 기업들은 빚더미에 앉았다. 기업 부실은 이들과 거래하던 은행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국세청에 사채상담 창구가 열리자 사채를 쓴 기업의 자금담당 임직원이나 사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국가기록원
국세청에 사채상담 창구가 열리자 사채를 쓴 기업의 자금담당 임직원이나 사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국가기록원

1970년대 들어 기업들의 경영이 급속히 악화된 것은 1960년대 중반 도입한 외국 상업차관의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면서 자금사정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환율을 18% 대폭 평가절하한 점도 기업들의 원리금 상환 부담을 가중시켰다. 또 당시 증권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들은 급전이 필요할 때 은행의 단기 차입금이나 사채에 의존했다.결국 정부가 나서야 했다. 1969년 당시 재무부는 83개 차관업체 중 45%가 부실기업이라고 발표했다. 청와대에 부실기업정리반이 꾸려져 30개 기업을 정리했다. ‘차관경제’의 과속 추진은 정권 실세들이 차관도입 승인 과정에 개입하는 등 정경유착과 부패 비리를 잉태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부실 차관업체들을 정리했음에도 적잖은 기업들은 연 40~50%의 고리사채에 힘들어했다. 대기업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용완 회장이 여러 차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기업들이 처한 현실을 토로하고 특단의 구제 조치를 요청했다.

“김용완 전경련 회장은 고리사채에 대해 정부가 비상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모든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역설했지요. 특히 자신이 경영하는 경성방직도 사채를 쓰고 있었는데, 최근 공장부지를 팔아 다 정리했다면서 조금도 사심 없는 건의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의 회고․한국 경제정책 30년사)

청와대도 심각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어떤 정책수단을 동원할지 고심하던 터였다. 남덕우 재무부장관은 고리사채를 은행대출로 전환시키면서 단계적으로 빚 부담을 줄여주자는 입장이었다. 다른 한편에선 그것으론 미흡하니 재계 요청대로 사채를 동결해주자고 했다. <중편과 하편에서 시리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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