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다 할 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서 '자동차와 조선 , 건설 강대국' 일군 철인
경제와 정치 리더십 절실한 때 '불굴의 용기와 도전' 펼친 '성취 아이콘' 그리워
아산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창업주.
그는 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가로 질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한국전쟁과 4.19혁명 ▲5.16쿠테타와 경제개발 ▲전두환 신군부 독재와 서울 올림픽▲여야 수평적 정권교체와 IMF 외환위기. 그야말로 파란과 곡절을 다 넘었다. 헐벗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경제대국의 밀알이 됐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열매를 누리고 있다. 그는 없던 길을 내고 있던 길은 더욱 넓혔다. 빈손으로 창업했지만 근면과 성실은 누구나 불가능하다던 벽을 하나하나 허물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렸다. 주변에서 어렵다고 말하면 "당신, 해봤어"라며 질책 했다.
소학교 졸업이 그의 학력 전부였다. 그러나 어떤 박사보다도 창조적인 발상을 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나는 하루종일 회사 일을 생각한다. 그럼 해결책이 나온다. 그래서 회사 주인이 됐다"고 말했다.
서해안 간척지를 메울때 유조선을 동원해 물길을 틀어 잡았다. 기발한 착상이었고 해외 토목학회의 화제가 됐다.
기존 공법과 기본 경제질서로는 엄두가 나지 않은 일도 그의 머리를 거치면 돌파구가 열렸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는 담담한 마음을 가졌다. 그게 현대그룹의 사훈이 됐다. 리더는 그렇게 '태연'(泰然)해야 한다는 것을 정주영은 몸소 보여줬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정주영은 울산의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세워야 했다. 영국에 돈을 꾸려 가면서 그는 호주머니에 비장의 무기 하나를 집어 넣었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펴 보이면서 그는 "500년전에 철선을 만든 나라다. 이 걸 믿고 돈을 꿔주라. 그러면 그 돈으로 도크를 만들어 배를 만들어주겠다"며 영국의 내로라하는 투자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정주영은 조선소도 없이 일감을 따냈고 결국 세계 최대 조선소를 일구었다.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업계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동차의 국산화를 이뤄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금 그가 신고 세계를 누볐던 낡은 구두는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내 아산기념관에 있다.
1980년대 전경련 회장으로 재계를 이끌던 정주영은 정부마저 주저했던 88서울 올림픽을 유치했다. 곧바로 대한체육회장 자리까지 맡아 체육인으로 나섰다.
여기서 더 나아가 기업에 대한 정치권의 압박을 이겨내고자 실제로 정당을 만들고 대통령선거(1992년) 후보로 뛰어든 정치인이었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마다 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주영이 곧 한국 현대사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의 생애를 기억하는 게 그에게 진 빚을 갚는 하나의 길이라 생각한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성장 드라마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각본없는 드라마였다. 이렇다할 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가 기업가 정주영을 만난 것은 그래서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제역사 전문채널인 이코노텔링은 시대의 선각자 정주영의 삶을 다시 뒤돌아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정치와 경제의 리더십이 절실한 요즘 그가 남긴 선명한 발자취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 것이라 확신한다. 정주영이란 '성취의 아이콘'이 그리운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회부터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이자 저널리스트인 이민우 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 총장의 시각으로 정리한 정주영의 히스토리가 펼쳐진다. 연재는 이민우 편집고문의 집안과 정주영의 운명적인 만남 장면에서부터 그려진다.
정주영 22주기(3월21일)에 즈음해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코노텔링 임직원들은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