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심 있고 용맹했지만 융통성과 판단력 모자라 워털루 전투 그르쳐
프로이센 합류 막으라는 '나폴레옹 지시' 이행 못해 유럽의 역사 바꿔
역사의 물줄기는 영웅과 대사건으로 굽이치기도 하지만 보통사람들 때로는 어리석은 자의 선택-행동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에 의해서도 크게 바뀐다.
그렇게 부작위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 에마뉘엘 드 그루시(1766~1847)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에 밝은 이가 아니라면 이름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그렇다.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벨기에 중부 워털루에서 유럽의 운명을 가를 대전투를 벌였다. 상대는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5개국 동맹군이었다.
동맹군이 60만 대군인데 반해 프랑스군은 10만 남짓했으니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뭉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기로 했고, 선발대가 6월 15일 프로이센군을 격퇴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했다. 이어 하루하루 강해지던 웰링턴군과의 결전을 위해 17일 카트르 브라고지로 진격하면서 "자신이 임명한 마지막 원수" 그루시에게 전 병력의 3분의 1인 3만여 명을 떼어주며 독자적인 지휘권을 맡겼다. 그루시의 임무는 전날 격파한 프로에센군을 추격해 섬멸하거나 최소한 웰링턴군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루시가 그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재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했지만 융통성과 본능적인 판단력, 자율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루시가 유능했던 선임자들이 러시아 원정 등에서 이미 많이 스러졌기에 결정적 순간에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며 "최고의 길을 공략해서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20년간의 전쟁 경험 덕에 저절로 길이 열린 셈"이라고 갈파했다.
어쨌거나 그루시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당시 전황은 나폴레옹군과 웰링턴군이 정면대결을 벌이다 기진맥진한 끝에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어 어느 편 지원군이 빨리 오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형국이었다. 그런데 쏟아지는 빗속에서 전날 전투로 기동력이 떨어진 보병 중심의 그루시군은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섬멸하기는커녕 동맹군 합류를 저지하지도 못했다.
엉뚱한 곳을 헤매느라 적군의 그림자도 못 본 상태에서, 워털루 전장의 대포 소리를 들은 부하들이 즉각 그곳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루시는 망설이기만 했다.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집착해 "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 임무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결국 프로이센군이 웰링턴군에 합류한 결과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결정 났고, 그 결과 아다시피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어 유럽 대륙의 역사도 요동쳤다. 준수한 기병 지휘관이었으나 '대장'의 재목은 결코 아니었던 그루시의 맹목적인 고집은 "충실한 부하는 훌륭한 리더가 되지 못한다"는 산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에서 스탈린까지 '권력자' 12인의 행적을, 솔선수범·근면·학습 등 열쇳말 중심으로 교훈과 반면교사를 길어낸 『권력의 자서전』(김동욱 지음, 글항아리) 중 '그루시-맹목'편에 실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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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