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정부의 '상공부장관' 자리도 거절… 일본유학시절 "귀국해 한 몫하자'며 애국고취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1907~1984)은 지금도 '바른 경영인'의 표상으로 꼽힌다. 경남 함안군 부농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경영할 때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어려움과 마주해도 바른 처신을 했다고 한다. 분명 그의 경영관은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생전에 “기업인이 왜 기업은 하는가? 우선은 이윤을 추구하기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지만,이것은 기업의 숙명적인 속성일 뿐, 실은 기업을 통해서 성취의 희열을 얻기 위함이요, 이 성취를 통하여 자기의 인격 완성을 기하고자 기업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라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기업경영은 기업가의 인격을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른지만 조홍제 창업주는 이익을 다툴 때 마다 의로움을 먼저 생각했다(見利思義). 5.16직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판정에 섰지만 누구 탓을 안하고 “자신이 다 했다고”고 진술해 주변을 깜짝놀라게 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함께 삼성의 모기업인 삼성물산을 동업할 당시였으나 서로 헤어지기로 이미 마음먹고 지분 정리작업을 할 때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해외사업 때문에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삼성을 대표해 군 법정에 나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혁명의 분위기를 탄 군중들에게 ‘물자부족 시절의 수입대체 산업 육성과 같은 기업인의 역할을 이야기 해봐야 씨가 먹히지 않을 것이고 변명과 해명이 구차해 보일 수 있어서’ 그렇게 진술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또 이병철 회장과 동업관계를 정리하면서 많이 양보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십수년간 온 정성을 기울여 이룩한 삼성물산의 청산을 요구 할 생각이 없다”며 고 흔쾌히 회사를 떠났다.
그는 자신의 사업 기준에 비춰 방향이 다른 곳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1960년대 초반 국내 맥주시장을 이끌던 두 회사중 한 곳이 매물로 나오자 너도나도 탐을 냈다. 그런데 여러 사정상 조홍제 창업주가 결심만 하면 그에게 그 맥주회사 경영권이 넘어 갈수도 있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가 아무리 돈 버는 것을 생각하는 기업가라 하더라도 술 장사는 안 한다”고 말해 없었던 일이 됐다. 그런 조 창업주의 의지는 효성이 한 때 국내 5대그룹으로 성장할 때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조홍제는 신학문을 접한 인텔리였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당시 일본인 교수가 대학원에 진학해 학자의 길을 권할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일본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오자 한 자리를 하라는 권유를 여러번 받았지만 다 뿌리쳤다. 자유당 이승만 정부는 ‘경제이론과 경영 실무’에 밝은 그에게 상공부장관 자리를 제안했지만 못 들은척 했다. “나는 기업하는 사람이다. 기업하는 사람이 기업을 해야 정도 아닌가”라며 끈질기게 나돌던 조 창업주의 정치입문설도 일축해버렸다.
이와 관련해 조 창업주의 장남인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은 “어찌보면 선친은 사업가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우(晩愚ㆍ조홍제 창업주의 호)는 자신에 대한 ‘이상’이 너무 높았다. 오히려 선비의 성품이 강했다”고 회고했다.
조홍제 창업주가 중앙고보 재학시절 6.10만세 독립운동(1926년 순종황제 국장때)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것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일본유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자취하던 집을 ‘동명사’라 불렀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젊은이들이고 여기서 각자의 공부를 마치면 모두 조국으로 돌아가서 한 몫을 해야 하는 인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동방명성(東方明星)이란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리라. 이 동방명성을 줄여 동성(동성)으로 함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