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이 나서 붕당으로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게 한 소인이라며 반대론
성종, 권한없는 행직 임명…요신(妖臣)은 연산군 갑자사화 빌미 제공

수많은 이들이 촛불을 켜 들고 권력에 맞서는 '촛불시위'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만하다. 소리도 없고 불꽃을 피워 올리지도 않지만 면면한 저항 의지를 상징하는 '촛불'은 박근혜 정권의 퇴진까지 이뤄낸 바 있으니,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불릴 만하다.
이 촛불시위가 한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700여 년 전 조선의 성종 때다. 1488년 궁궐 밖 임원준의 집에서 병을 치료해온 인수대비의 몸이 회복되자 그의 적장자 임사홍을 절추장군부호군에 임명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임사홍은 붕당으로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게 한 소인이라 해서 벼슬에서 떨려났다가 직첩만 돌려받은 상태였음을 들어 대간들은 소인을 쓰면 나라를 그르치게 될 것이라며 반대론을 폈다.
그러나 마음이 기울어진 성종은 "임사홍이 비록 소인이라고 해도 그대들과 같은 올바르고 당당한 사람들이 바로잡으면 어찌 나라를 그르치겠는가?"라며 임사홍의 재등용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언관들이 행동에 나섰다. 11월 30일 대사헌 이칙과 대사간 안호 등은 촛불을 밝히고 무리를 지어 임금 앞으로 나아가 "종묘사직과 백성이 위태로워지고 망하는 것은 임사홍을 기용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성종을 윽박질렀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집단행동에 나선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임사홍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중신들 간에 분란을 일으킨 사례는 젖혀두고 무리하게 사욕(私慾)을 추구한 일만 들어보자.
1488년 대사헌 성준이 문제 삼은 일이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가 충청도 향시에 합격했는데 이는 법의 규정에 따르면 서울에 사는 재상의 아들은 충청도 향시에 응시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임희재의 아버지와 형이 시험관과 내통하여 법을 어기고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며 요즘으로 치면 감찰기관인 대간에서는 임사홍 일가와 시험관을 국문하도록 청한 일이 있다. 문장에도 능하고 통찰력도 있는, 요즘으로 치면 능력자였던 임사홍의 도덕성이 그랬다.
어쨌든 성종은 대간의 의심과 반대를 물리쳤다. "오늘 만약 임사홍을 기용하면 내일 나라가 망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그를 임용했다. 단 권한이 없는 행직(行職)에 앉힘으로써 그가 권력을 얻어 나라를 그르칠 것이란 비판을 비껴 갔으니 조선 최초의 '촛불시위'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는 『성종, 군주의 자격을 묻다』(방상근 지음, 푸른역사)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시대'라고도 불릴 정도로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종도 후계자인 연산군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고 훗날 갑자사화의 빌미를 제공한 임사홍 같은 요신의 싹을 자르지도 못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성종이 임사홍을 재기용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임사홍이 초야에 묻혔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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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