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2:35 (금)
뉴욕을 만든 사람들⑮세계를 훔친 '바브라의 매직'
뉴욕을 만든 사람들⑮세계를 훔친 '바브라의 매직'
  • 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 henryk@nestseekers.com
  • 승인 2019.07.01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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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어린시절 역경딛고 배우와 가수로 우뚝…미국의 연예상 '그랜드슬램' 기록
74세에 발표한 노래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 아직도 그녀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
불꽃 연기와 열정적인 가창력을 겸비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미국 연예역사를 바꿨다. 상이란 상은 다 받았다. 2년전에는 그녀의 노래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나이 74세 이운 기적아닌 기적이었다.
불꽃 연기와 열정적인 가창력을 겸비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미국 연예역사를 바꿨다. 상이란 상은 다 받았다. 2년전에는 그녀의 노래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나이 74세 이운 기적아닌 기적이었다.

전설적 팝 디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그녀의 뜨거운 가슴과 열정은 누구도 못 막는다. 그런데 지난 3월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녀는 영국 일간 ‘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 잭슨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두 남성에 대해 “그들은 거기서 짜릿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잭슨의 성추행을 옹호하는 듯한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비난세례가 빗발쳤다.

1942년생이니 올해로 77세인 고령인데도 그녀의 가창력은 녹슬지 않아 보인다. 2016년 9월초에 그녀의 새 앨범 '앙코르:무비 파트너스 싱 브로드웨이'(Encore:Movie Partners Sing Broadway)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로써 그녀는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11번이나 차지했다. 여성 아티스트 중 최다 기록을 세웠다. 남성 아티스트를 포함하면 비틀즈(19회)와 제이 지(13회)에 이어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여성 아티스트 2위 기록은 마돈나(8회)다. 어쩌다가 1위한 게 아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녀의 끊임없는 노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그녀가 데뷔한 1960년대부터 50년간 빌보드 차트에 1위를 기록하는 가수는 그녀가 처음이다. 2009년과 2014년도에도 빌보드 1위를 기록한 앨범도 있다.

그 나이에 앨범을 내는 것 자체가 뉴스인데 빌보드 정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 빅 뉴스이다.10년 터울로 1위에 이름을 올린 기록자체가 전무하고 후무 할 것으로 보여진다. 그녀는 뉴욕 토박이다. 뉴욕을 빛낸 뉴요커이다. 1942년 4월,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오스트리아계 유태인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린 나이에 사망해 어릴 적 그녀는 ‘흙수저’이다. 삶에 대한 고통을 겪으면서 성장기를 거쳤다. 생활비가 없어 티백을 항상 두 번 이상이나 우려내 차를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마셨던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고 얼마 전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노래 부르기를 즐기던 바브라는 대스타의 꿈을 안고 연극 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갈 형편이 안되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극장표 안내원, 가정부, 전화교환원 등으로 그녀는 10대 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그녀가 18살이 되던 해에는 뉴욕에 있는 한 나이트 클럽에서 벌어졌던 탤런트 콘테스트에 나가 우승하며,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굴은 빼어난 미모형은 아니지만, 노래 실력 만큼은 출중했다. 1962년에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Needles & Pins』에 출현하여 연극 배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4년에 '퍼니 걸'로 브로드웨이에서 첫 성공의 단추를 뀄다. 자서전적인 뮤지컬이었다. 무명의 뮤지컬 여배우가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하는 과정과 그녀의 사랑과 이별을 다뤘다.

그녀는 주인공을 맡아 비범한 재능을 보였고 관객은 열광했다. 아마 자신의 당시 모습을 드러낸 일체감과 감정이입이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연기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그의 연기력에 관객들은 환호했고 공감을 표했다. 그 뮤지컬은 영화로도 리메이크돼 결국 그녀는 아카데미영화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당시에 여우주연상은 누구나 그녀가 받을 것이라고 점칠 정도로 그와 견줄 배우나 영화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63년에는 드디어 컬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 앨범 「Barbra Streisand Album」을 발표한 이후로, 1974년에 발표한 싱글 <The Way We Were>을 내놨고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두 번의 아카데미상(영화), 한 번의 토니상(연극), 5번의 에미상(TV), 10번의 그래미상(음악), 13번의 골든 글로브상(영화/뮤지컬/드라마)을 수상했다. 이는 전무후무한 아티스트계의 ‘그랜드슬램’ 기록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4개 분야의 상을 모조리 받은 사람은 없다. 그것도 여러 번씩.연예인들이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받았다.

지금까지 40년간 팔린 그녀의 앨범은 2억 5천만 장에 이른다. 세계적으로 정확한 통계가 없어서 세계 최대 판매기록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분명히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 보다는 많이 판 셈이지만, 엘비스 프레슬리 보다 더 팔았는지는 전문가들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 최대 앨범 판매 가수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 그녀가 태어난 브루클린 윌리엄즈버그는 지금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동네다. 맛 집과 작은 빈티지 가게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곳으로 바뀌었지만 그녀가 태어날 당시의 그 동네는 뉴욕에서 가장 못사는 노동자들의 둥지였다. 그녀가 태어난 후 두 살도 안되었을 당시 교사로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다. 어머니는 바로 재혼했다. 이후 그녀는 정신적으로 방황한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엔 연기 스타로서 성공을 향한 집념은 더욱 타오른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독립한다. 강 건너 맨해튼으로 건너가 연예기획사를 떠 돌았다. 낮에는 동분서주하며 연기연습을 했고 밤에는 일을 했다. 고생하는 그녀를 보고 엄마는 연기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그녀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온 그녀의 행색은 집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말릴수록 그녀는 보라듯이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굳힌다. 다시 거리를 헤매며 연극과 무대를 찾는다. 그러한 어두운 시절을 보내면서 성공의 담금질을 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녀의 연기의 완벽성을 추구해 주변 연예인이나 제작진과 마찰을 빚었다. 일부는 그를 피했다.성격도 까칠했다.한번이라도 그녀와 일을 함께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는 그녀와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성격이 온순하기로 유명한 로버트 레드포드도 그녀와 함께 영화를 촬영한후 다시는 그녀와 공연을 안할 것이라고 기자들한데 슬쩍 말한 적도 있다.

그녀는 1998년 재혼한 두 번째 남편과 함께 맨해튼에 살고 있다. 그녀가 미국에서 세운 ‘연예사의 대기록’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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