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0:30 (금)
[김성희의 역사갈피]조선 시대 처가 위상
[김성희의 역사갈피]조선 시대 처가 위상
  •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 jaejae99@hanmail.net
  • 승인 2022.10.31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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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가도 시가와 친정 똑같이 대하고 나아가 친정 부모와 동거 생활도
집안 대소사 처가 식구들과 협의 … 여성 인권이나 위상 생각보다 좋아
조선 시대 중기 여성들은 도리도 다하고 할 말도 다 하는 여성들이었다/이코노텔링그래픽팀.

"예순 가까운 나이에 혼자 잔다면 기운 보양에 이로워 그대에게 좋은 것이지 내게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니니 영원히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해 수명을 늘리시라."

이건 조선 중기를 살아간 여류시인 덕봉(德峰) 송종개(宋種介·1521~1578)가 1570년 남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홍문관 관리로 한양에서 4개월간 홀로 머물던 남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담양 본가에 머물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간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며 "보답하기 어려운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색을 낸 데 대한 답이다.

덕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곁에 친한 벗이 있고, 아래로 가족과 종들이 있어 뭇사람이 보아 저절로 공론이 퍼질 텐데 애써 편지를 보낸 것은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다"고 준엄하게(?) 꼬집는다.

이뿐 아니다. 『덕봉집』이란 문집을 남겼을 정도로 시문에 밝았던 덕봉은 더욱 당찬 요구도 했다. 1571년 남편이 전라감사로 부임하자 친정아버지 묘 앞에 석물을 세우는 마지막 작업을 계획했다. 한데 미암이 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내켜 하지 않자 덕봉은 간곡하지만 당당한 글을 지어 보낸다.

"…겨우 4, 50말의 쌀이면 공역을 끝낼 수 있는데도 이처럼 귀찮게 여기니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나 또한 박하게 베풀고 그대에게 두텁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의 상에 마음을 쏟고 힘을 다하여 예법으로 장사와 제사를 지냈으니, 나는 남의 며느리가 되는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 글을 받은 남편 미암은 곧 사람을 보내 일을 시작하게 하여 한 달여 만에 처부모 무덤 앞 석물을 완성시켰다.

이는 유희춘이 근 11년 동안 기록한 『미암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를 보면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성리학에 바탕한 숨 막히는 가부장 체제가 자리 잡지 않았고 따라서 여성의 인권이나 위상도 그리 열악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담양이 고향인 덕봉은 해남 출생의 미암과 결혼한 뒤에도 친정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며, 집과 토지를 상속받아 부모 제사를 지내며 살았다. 남편 미암은 처가 식구와 수시로 왕래하면서 대소사를 의논했는데 심지어 양가 제사에 서로 참례할 정도였다. 덕봉의 딸도 혼인 후 딸을 낳고도 덕봉과 계속 함께 살면서 외출이나 모임, 이사 등을 덕봉과 함께했으니 요즘 세태와 그리 다르지 않다.

조선 시대 중기에 도리는 다하고 할 말도 하는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은, 『아주 개인적인 한국사』(모지현 지음, 더 좋은 책)에 실렸다. 피란기, 표류기, 여행기, 일기 등을 중심으로 한국사의 큰 줄기를 짚어낸 이 책에는, 훗날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은 사적인 기록들을 들춰낸 덕에 그만큼 생생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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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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