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6:10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㉘나치 나팔수 괴벨스와 영화감독 리펜슈탈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㉘나치 나팔수 괴벨스와 영화감독 리펜슈탈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11.0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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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 도구로 영화 쓰임새 간파한 히틀러, 여류 감독 영입해 제작 전권 주고 온갖 지원
발탁한 정치선동의 귀재 괴벨스"선전은 본질상 예술…매순간 대중의 맥박에 촉각을"

선전ㆍ선동의 귀재 히틀러에게는 명석한 참모진이 있었다. 여류 감독 리펜슈탈과 충성심 강한 괴벨스가 대표적이다. 둘 모두의 공통점은 영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영화를 효과적인 선전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갖고 있던 선전ㆍ선동의 힘의 원천은 그 자신이었다. 히틀러에게는 누구 못지않은 영화를 보는 '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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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위대한 배우다!

히틀러에 대한 채플린의 평가다. 채플린은 그를 어디서 봤을까? 당연히 미디어, 그것도 영화나 뉴스 등 동영상을 통해서였다.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자로, 영화계에서 평생을 보낸 채플린의 눈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의 눈에 미디어에 노출된 히틀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계산 아래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격정에 찬 목소리와 과격한 몸짓마저도 그에게는 '연기'로 보였다. 무대장치와 조명도 한 몫을 했다. 미디어는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 리더로, 국가적 영웅으로, 나아가 신(神)으로까지 보이게 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왜 이토록 '연기'에 집중했던 것일까? 대중, 청중, 국민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꿈인 세계지배를 이룰 수 있었을 테니까.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의 리더 푸틴을 보라! 징집령을 내리자 청년들의 대탈출이 시작됐다. 그가 히틀러를 연구하고 히틀러의 기법을 히틀러의 반(半)만 활용했어도 그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히틀러의 '연기'는 대성공을 거뒀다. 국민 모두 히틀러에 열광했으며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모두가 그의 최면에 걸린 듯 보였다.

히틀러는 무엇보다 라디오를 중시했다. 국민 전체를 '관객'으로 한 '연기'가 가능했던 탓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목소리만 전달됐기 때문이다. 영화는 라디오의 이 '약점'을 커버해 줬다. 발명된 지 30~40년에 불과했지만 이미 영화는 대중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잘 하면 라디오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정권을 잡자마자 그는 영화를 통한 '이미지 만들기'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유능한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입에 성공했다.

■ 리펜슈탈, "히틀러는 영화를 알고 있었다"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그는 여류 무용가이자 배우였다. 하지만 야심이 컸다. 직접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1932년 마침내 꿈을 이룬다. 자신이 각본에 감독, 주연, 나아가 제작까지 맡은 영화 <푸른 빛>을 만든 것이다. 영화는 훌륭했다. 좋은 평을 받았다. 베니스영화제 초청도 받았다. 1902년생인 그는 당시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감독으로서의 명성까지 얻었던 것이다.

히틀러와 레니 리펜슈탈
히틀러와 레니 리펜슈탈.

히틀러는 그에게 눈독을 들였다. 몇몇 유명 감독에게 자신의 영화를 부탁했었지만 수락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리펜슈탈은 달랐다.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마지못해 수락한 게 아니었다.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이미 히틀러에 매력을 느꼈고 내심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런 그를 믿었다. 능력도 충성심도 출중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그에게 영화제작의 전권을 줬고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리펜슈탈의 재능과 히틀러의 신뢰는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첫 번째 영화가 1934년 작 <의지의 승리(Der Sieg des Glaubens)>. 1933년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5차 나치당 전당대회를 촬영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30대의 카메라와 120명에 이르는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작. 비록 프로파간다영화이기는 했어도 작품의 예술성만큼은 지금도 인정받는다. 다음해 베니스영화제 외국어 다큐상을 받기도 했다.

2년 후에는 더 대단한 영화가 나온다.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장 오토 마이어의 요청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대한 기록영화 〈올림피아〉 2부작을 만들게 된 것이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과 관련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리펜슈탈은 이 영화에서도 히틀러의 전폭적 지원 아래 자신의 재능을 한껏 구사했다. 비록 이 영화 역시 나치즘 찬양을 위한 선전물이었지만 독보적인 영상미학은 지금도 찬사를 받는다.

히틀러의 프로파간다 정책에는 또 한 명의 전략가가 동참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다. 나치즘과 히틀러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1933년 집권하자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 나치 및 히틀러에 대한 선전ㆍ선동의 총책임자로 활약한다. 이때 발휘된 능력이 워낙 탁월해 당시 '선전ㆍ선동의 제왕'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가 만든 '선전ㆍ선동의 원칙'은 지금껏 선전ㆍ선동가들의 필독 자료가 됐다.

선전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어보라. 그는 "선전은 본질상 예술"이라며 "매일 매 시간 대중의 맥박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놀랍다. 마치 죽어가는 VIP 환자의 잠자리를 돌보는 주치의처럼 대중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주로 메시지 전달에 애썼던 '대중조작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능가한다. 누가 뭐래도 그는 예리하고 섬세하며 열정적인 선전ㆍ선동의 귀재임을 알 수 있다.

히틀러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
히틀러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

괴벨스는 특히 뉴스다큐를 포함한 영화에 애착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 중에도 일주일에 3회씩 영화를 감상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측근은 물론 다수의 영화 전문가들도 동참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는 뉴스다큐에 훨씬 심혈을 기울였다. 그만큼 뉴스다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뉴스다큐는 중요한 선전무기"임을 강조했는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뉴스릴로부터 전쟁과 그 원인과 영향에 대한 최고의 통찰력을 끌어낸다"고 말했다.

리펜슈탈과 괴벨스를 보면 영화를 활용한 선전ㆍ선동의 능력이 히틀러보다는 그 참모진에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참모진의 재능만으로 그런 성과를 내는 게 가능했을까? 히틀러에 대한 리펜슈탈의 평가를 보자. 그는 "총통은 영화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며 "'영화에는 사건을 기록하고 해설하는 기능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미리 내다본 국가가 세계 어디에 또 있었는가?"라고 반문한다.

결론적으로 히틀러는 영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영화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이로써 그는 독일 국민으로부터 '국민과 국가를 사랑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여기에 대공황까지 극복한다. '패전'에 따른 독일 국민의 상처와 자존심을 지킨 '위대한 지도자'가 됐던 것이다. 국민의 이 같은 지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원동력이었다. 결국 세계전쟁은 히틀러의 '연기력'에 기인한 결과였다. 채플린은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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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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