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5:40 (토)
◇'新남방정책'과 華商역사②화교와 화인 구분
◇'新남방정책'과 華商역사②화교와 화인 구분
  • 홍원선 이코노텔링 대기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ong2003@hotmail.com
  • 승인 2019.09.05 12: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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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는 해외로 이주한 사람을 일컫고 화인은 외국에 뿌리를 내려 현지 국적을 딴 사람
청조말 아편 전쟁 후 생계터전 무너지자 바다 인접 광동과 복건 출신들 대거 동남아로
영국 등 서구열강 식민지 경영위해 노동력 필요했고 빈민 돌볼 힘 없던 청조 출양 허용

화교라고 하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돈을 많이 가진 해외에 사는 중국인이라는 이미지일 것이다. 우선 그들의 경제력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이어 화교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회문화적 특성을 가진 인구집단인지, 왜 넓은 자기나라를 두고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됐는지, 도대체 어떻게 큰 돈을 거머쥐게 됐는지가 궁금해진다.

천년 국제 무역도시 말레카의 차이나타운의 초입. 거리이름이 '존커거리'로 명명되어 있다. 정면에 보이는 붉은색 5층 건물엔 상단에 말레이시아국기와 중화인민공화국국기가 나란히 부착되어 있는 가운데 말레이시아와 중국의 국교수립 45주년을 경축한다는 글이 쓰여있다. 이곳의 화교화인들로서는 양국의 우호선린 유지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쿠알람푸르= 홍원선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천년 국제 무역도시 말레카의 차이나타운의 초입. 거리이름이 '존커거리'로 명명되어 있다. 정면에 보이는 붉은색 5층 건물엔 상단에 말레이시아국기와 중화인민공화국국기가 나란히 부착되어 있는 가운데 말레이시아와 중국의 국교수립 45주년을 경축한다는 글이 쓰여있다. 이곳의 화교화인들로서는 양국의 우호선린 유지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말레카= 홍원선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 화교(華僑)와 화인(華人)= 화교란 말의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화교는 중국을 떠나 삶의 근거를 해외로 옮겨 장기 거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장기 거주의 의미는 적어도 반년이상 수십년, 세대를 이어 수백년이 될 수도 있으나 여행이나 공무 혹은 학업을 위해 타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포함하지 않는다.

화교에 대응되는 말로 화인(華人)이 있다. 화인은 화교에서 더 진전된 개념으로 중국을 떠나 거주국에서 생활하면서 현지국적을 취득한 중국계 혈통의 사람을 의미한다. 즉 해외로 삶의 근거를 옮긴 사람으로 중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수세대에 걸쳐 외국에 살아도 화교이나 해외거주의 기간에 상관없이 현지국적을 취득하면 화인이 된다.

화교는 중국인이나 화인은 특정 국가의 국민이고 단지 혈통적으로 중국계란 의미가 된다. 이제까지 역사적 경험을 보면 보통의 경우 중국인 해외이민 1세대가 화교로 살다가 당대에 거주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아니면 다음 세대에 국적을 취득하였고 이후로 이들의 후손은 화인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 말과 함께 華裔란 말도 간혹 사용되고 있다. 이는 중국인의 후예란 개념으로 혈통적으로 중국계란 의미로 사용되며 화인과 많은 부분 개념적으로 겹친다.

◇ 화교의 태동= 그럼 화교는 역사적으로 언제 등장한 것일까? 중국의 역사서엔 한왕조 시절부터 중국인이 동남아지역과 교류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왕조가 들어서면서 중국과 외국 ( 동남아와 인도, 아랍 등 )과 교류가 제법 빈번해졌고 상업활동도 왕성해졌다. 이 시기 해외로 나간 상인 가운데 아주 소수가 현지에 눌러 살게 된 경우가 있으나 이는 극소수로 무시할 수준이다. 많은 중국인이 해외로 나간 것은 명말청초부터이다.

중국대륙을 한족이 아닌 이민족인 만주족이 지배하게 되면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잔존 명조의 군대나 사대부 정치인 등의 상당수가 동남아로 이주해 가장 초기의 화교가 된다. 물론 간간이 상인들이 해외로 이주해 정착한 예도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대량의 화교가 배출된 것은 바로 아편전쟁 이후의 일로 이 전쟁을 계기로 중국인의 해외이주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편전쟁 이전 중국인의 출양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아편전쟁 이후 청조와 서구제국의 연이은 조약체결로 중국인의 해외이주는 조정이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됐다. 서양 제국이 청조를 압박해 중국인의 해외이주를 완전히 자유화시킨 것은 해외로 가고 싶어 하는 중국인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수요에 의한 조치였다. 아편전쟁 이전 동남아지역은 태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가 서양열강에 의해 식민지로 분할되어 있었고 서구식민자들은 방대한 식민지 경영을 위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원래 식민지 개발을 위한 노동력을 본국이나 동남아 토착원주민을 활용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생각은 바뀌게 됐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중국인과 인도인 노동력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청조는 신민의 출양을 법으로 엄격히 통제해서 중국인 노동력을 데려가기 위해서는 이 법규정을 우선 손질해야 했다.

중국에 뿌리를 둔 화인 중 적지 읺은 사람들이 동남아 시장에서 큰손 역할을 한다. 특히 싱가폴과 말레이지아에서의 화인의 영향력은 센 편이다.

중국은 청조시기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당시 토지생산력으로 모든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고 이와 관련된 태평천국의 난과 각종 민란으로 농촌지역은 더욱 피폐해졌다. 도시 지역의 수공업도 아편전쟁 이후 서구의 덤핑공산품이 대거 밀려들어오면서 거의 대부분 수공업자들이 도산했다. 아편전쟁 이후 복건 하문의 면직물이나 각종 실을 생산하는 수공업자의 99%가 붕괴됐다는 학술보고가 있다.

중국 동남연안의 민중들은 도저히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었고 이때 오랜 금령이 해제되어 자유스런 출국이 가능하게 됐다. 이때부터 우리가 익숙한 화교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출양목적은 앞서 명말청초의 군인이나 사대부의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한 경제적인 이유, 생존을 위한 목적으로 바다를 건넜다.

이제 중국인들, 특히 동남지역의 중국인이 자신의 땅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왜 하필 동남아지역을 선택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바탕에 광동, 복건 등 중국 동남연안지역의 주민들에게 내재 해있는 해양문화 속성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은 수천년 이어져온 농업경제 사회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농업에 기반해 생존해왔다. 농민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성 한 가지는 '안토중천'(安土重遷)사상으로, 농민은 한번 기반을 내린 곳에서 쉽게 터전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자손대대 살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해양문화는 이런 농경문화와는 좀 다르다. 동남지역은 해안지역이고 또한 동남아와 가장 가까운 곳이며 무려 2천년에 걸쳐 이곳과 교류해온 역사가 있다. 해외의 새로운 사조와 문물도 중국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이 바로 이곳 동남지역이며, 이들의 정신은 농경문화에 비해 개척정신과 모험심이 강하다. 연구자들은 이런 중국 동남지역의 정신적인 가치관이나 특성을 해양문화특성이라고 개괄하고 있다. 동남아지역에서의 높은 노동력 수요에 이어 고향에서의 생존난 그리고 이들의 모험심과 개척정신이 겹쳐 동남지역 광동 복건 사람들이 대거 동남아행에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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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 2019-10-01 14:29:26
머리에 쏙쏙들어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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