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1:30 (토)
◇ 김수종의 취재여록 ⑱ 부부 등대에 어린 애틋한 사연
◇ 김수종의 취재여록 ⑱ 부부 등대에 어린 애틋한 사연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2.10.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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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8 ~ 10 코스 '동난드르' '사계리' 포구에서 바닷 길 밝히는 '재일 교포의 애향심'
척박한 어촌서 태어나 살아 보겠다고 渡日…성공한 교포들 고향에 들러 우물 정비 등 도와
고향에 기여한 고령의 교포1세 일부가 ' 생활 궁핍 '해 이들을 돕자는 움직임 제주에서 일어
동난드르 진황등대. 사진=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
동난드르 진황등대. 사진·동영상=김민수.

빨간 양산을 든 여인이 하얀 등대를 향해 걸어갑니다. 까만 바위 끝자락에 서 있는 등대는 마치 조각품 같습니다. 등대 너머로 쪽빛 바다, 수평선, 뭉게구름이 듬성듬성 걸린 하늘이 일망무제로 펼쳐집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누가 그린 한폭의 풍경화 같기도 합니다.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8월 가까운 동향 사람들의 카톡방에 동영상 화면 하나가 떴습니다. 열어봤더니 등대 사진이었습니다. 드론을 적당한 높이로 띄워 등대 주변을 한바퀴 돌며 찍은 정말 멋있는 이미지였습니다.

카톡방 사람들도 그게 어디 있는 등대인지 몰라 헤맸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토막토막 정보가 모여져서 등대의 정체가 나왔습니다. 그 등대는 제주도 서귀포시 서쪽 해변에 있는 '진황등대'입니다.

서울 사람들에겐 제주도의 지명을 얘기하는 것보다는 올레코스를 말해주는 게 훨씬 이해가 쉽다고 합니다. 올레 8코스가 9코스로 이어지는 지점에 '동난드르'라는 마을이 해안 절벽 아래 있습니다. 필자의 고향 인근인 이 곳 해변은 제주섬에서 불도저 자국이 비교적 적은 지역으로 마을 사람 이외에는 올레 관광객들이나 다니는 한적한 곳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등대의 뜻은 "바닷가나 섬 같은 곳에 탑 모양으로 높이 세워 밤에 다니는 배에게 목표, 뱃길, 위험한 곳 따위를 알려 주려고 불을 켜 비추는 시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등대는 이런 사전적 의미를 넘어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크루즈나 연락선을 타고 오랜 시간 밤 바다를 항해해 본 사람이면 멀리 어둠 속에 목적지 항구의 등대 불빛이 보일 때의 안도감과, 출항할 때 멀어져 가는 등대 불을 보며 부둣가에 배웅해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이별의 정취에 젖습니다. 바다에서 배를 타 보지 않은 사람도 해변의 등대를 보면 향수 같은 걸 느낍니다.

사계포구 춘지등대. 사진=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
사계포구 춘지등대. 사진·동영상=김민수.

진황등대는 겉모습과 배경도 멋지지만 등대가 생긴 사연이 기막히게 아름답습니다.

동난드르는 옛날 여자는 물질(해녀)로, 남자는 고기잡이로 먹고 사는 척박한 어촌이었습니다. 일제 시대 제주도 해안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도 먹고 살기 위해 여럿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강진황도 그런 재일교포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열심히 일해서 나름 성공했던 모양입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자 재일교포들은 고향을 찾기 시작했고, 고향 마을에 우물을 정비해준다든가 공회당을 지어주는 등 물질적 기여를 많이 했습니다. 일본은 전후 경제부흥으로 잘 살기 시작할 때였고 한국은 보리고개 넘기가 힘겨운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강진황은 좀 다른 방법으로 마을에 기여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의 향수를 간직한 마을 포구에 등대를 세워 마을 어부들의 뱃길을 밝혀주기로 했습니다. 1993년 당국의 허가를 받아 자비 7천200만원을 들여 해안절벽 위에 등대를 세웠습니다. 아마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기 족적을 그렇게 남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당국은 그 공적을 기려 '진황등대'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진황등대로부터 서쪽으로 약 4~5㎞ 떨어진 곳 올레 10코스에 안덕면 사계리 포구가 있습니다. 요즘 사계리는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으로 유명 관광지 마을이 됐지만 옛날에는 그렇고 그런 어촌이었습니다.

이 마을 출신 스무살 처녀 김춘지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돈을 벌어 잘 살아보고 싶었겠지요. 그녀는 일본에서 인근 마을 동난드르 출신 강진황을 만나 결혼했고 플라스틱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김춘지는 남편이 진황등대를 만든 2년 후인 1995년 자비 1억원을 내놓아 고향 사계리 포구 방파제에 빨간 등대를 세웠습니다. 당국이 '춘지등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왜 이들 부부가 각자의 마을 해변에 등대를 세울 마음을 품었는지 기록이 찾지 못하니 그저 추측을 해볼 뿐입니다.

작가 김민수가 그린 자화상과 흑우. 사진·동영상=김민수.

강진황 김춘지 부부가 어렸을 때 제주도의 어촌은 전기가 없어 밤만 되면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배를 타고 고기잡이 나갔던 어부들은 풍랑을 만나면 길을 잃거나 해안 바위에 부딪쳐 목숨을 잃은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동네 어부들의 죽음을 자주 들었던 이들 부부는 아마도 각자의 고향에 등대를 세워서 어선의 길잡이가 되게 하자고 이심전심 마음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등대가 되어 밤마다 서로 신호를 보내며 바라보자고 토닥였을 법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커플 등대가 생긴게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이 등대 이야기를 들으며 재일교포 1세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이 많은 돈을 모았을까요. 요새 얘기로 먹고 살 만큼 벌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뭔가 기여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야구세트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교사들도 야구공을 잡아본 사람이 드물었던 그 때 글로브란 걸 손에 끼고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게 놀이의 전부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바뀌어 이렇게 고향에 뭔가 기여하고 싶어 했던 20세기 재일교포 1세대가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이 든 교포 1세들이 궁핍한 생활을 한다는 얘기가 들리고 이들을 위해 지원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움직임이 이제는 그들의 고향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은 재일교포 1세들이 일본에서 뼈빠지게 일할 때의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자 나라가 됐습니다. 아마 오늘 날 같았으면 개인이 기부해서 등대를 세우겠다는 얘기가 나오기 전에 정부에서 먼저 등대를 건설할 것입니다.

이런 세태 변화를 생각하면 부부 등대 이야기는 아름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잔합니다.

이 부부 등대 이야기를 쓰면서 부수적으로 느끼게 된 점은 카톡과 드론의 힘입니다. 제주도에서 화가이자 사진 작가로 활동하는 김민수씨가 해변을 걷다가 그 사연도 모르고 조각처럼 아름다운 등대를 찍어 친구에게 보낸 것이 카톡방에 전해졌고 이를 계기로 진황등대에 대한 정보가 주섬주섬 모이게 된 것입니다. 카톡에서 오가는 대화 그리고 드론이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이 과거 신문 방송이 중심이 되던 미디어 모습을 엄청나게 바꿔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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